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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니 가로등 하나 없는 밤이었다. 설 전에 짐을 싸서 나가야 성공확률이 높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니 가로등 하나 없는 밤이었다. 설 전에 짐을 싸서 나가야 성공확률이 높다. ⓒ 김규환
선생님 자제인 정용이, 치용이까지 포함해서 1975년 초등학교 1학년 입학 때는 아이들이 48명이었다. 1981년 2월 6학년 졸업 때는 32명이었다. 저수지를 막느라 ‘함바집’을 운영하던 현희네가 5학년 때 이사 온 걸 제외하면 외지에서 들어온 아이는 없었다. 내가 본 동급생은 총 49명이었던 셈이다.

6년 동안 매일같이 한 교실에서 함께 살았던 우리는 누가 언제 이사를 갔는지, 왜 시골을 떠나 서울로, 광주로, 경기도 성남으로 떠나갔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소위 숟가락 숫자마저 알 정도로 서로에 대해 빠삭했다. 아이들 낱낱이 풍기는 냄새와 화장실 버릇을 알고 있어 누구 기침과 숨소리가 들리면 “병석아 얼렁 나와”하며 아이를 채근하기도 했다.

세상과 문 닫고 살았던 우리 마을을 비롯한 자잘한 네 마을은 뒤늦게 이농(離農), 탈농(脫農) 대열에 합류했다. 전라남도 인구는 시군별로 66년부터 68년까지 3년간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지금은 4~5만 명에 그치는 시군 인구가 10만이 넘지 않았던 곳이 거의 없었고 20만 내외가 대부분이었다.

1970년 군(郡) 단위 별로 4, 5천 명씩 1차 빠져나가더니 2차로 1975년엔 그 숫자가 최소 7, 8천에서 2만 명에 육박했다. 코흘리개 아이를 등에 업고 성공하지 않으면 다시는 밟지 않겠다는 굳센 다짐을 하고 고향을 등졌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농촌사회의 붕괴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새벽 2시 반 어른들은 첫닭이 울기 전 그 때 쯤이라고 했다.
새벽 2시 반 어른들은 첫닭이 울기 전 그 때 쯤이라고 했다. ⓒ 김규환
여타지역과 달리 1970년대 초반 전라도 지역 농촌은 벌써 시골을 떠나 서울 미아리, 하월곡동, 수유리, 왕십리, 화양리, 신당동, 창신동, 신림동, 봉천동 일대 달동네 일원이 되었다. 우리 지역은 70년대 후반에라야 농촌, 시골, 고향, 마을, 큰댁을 남겨두고 남몰래 울며불며 영영 보지 못할 사람이 되었다.

유난히 피부가 하얗던 이발소집 딸 화영이를 필두로 몸집이 왜소했던 찡거리 종호와 정용이 치용이 형제, 아버지를 일찍 여읜 형근이, 젊은 우리 마을 이장아들 병주가 차례대로 전학을 갔다. 이제 나머지는 가물가물하여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그렇게 17명이 우리와 헤어졌다.

소중한 친구들은 방학 때나 학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떠나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으니 그나마 위안이었다. 하지만 동네엔 이마저도 사정을 허락하지 않는 집이 꽤 있었다. 이른바 야반도주(夜飯逃走)였다.

새벽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밤밥’을 먹고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우리 마을에도 그 당시 다섯 집이나 있어 그 실상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하루하루, 365일, 5년 아니 10년의 삶이 어찌나 고단하고 궁핍했을까. 논뙈기 밭 한마지기 없던 사람들이다. 만날 남의 논밭 부쳐 먹고 도지(賭地)를 주고 나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집마저 남의 것이거나 움집에 들어가 살던 사람들이다.

솥단지에 밥을 넉넉히 해서 새벽에도 배불리 먹고 나서야 먼길에 쉬지 않고 갈 수 있다.
솥단지에 밥을 넉넉히 해서 새벽에도 배불리 먹고 나서야 먼길에 쉬지 않고 갈 수 있다. ⓒ 김규환
대개 1, 2월에 눈 내리던 날 벼 타작을 하던 풍경은 심심찮게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60호가 넘는 마을엔 주막도 세 곳이나 있었는데 밥 달라는 식구는 대여섯 명에서 열두어 명이나 되었다.

그 중 몇몇 집은 천수답(天水畓)은 물론 골짜기를 굽이굽이 올라가 마을에서 2km가 넘는 산골짜기에 논이 있어 익지 않은 벼가 태반이었으니 헛농사 짓기 일쑤였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지으면 더 곤궁하지고 빚이 늘어가게 마련이다.

어떻게든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은 치지 않게 하려고 보리, 쌀을 빌리고 고리(高利)로 돈을 빌려 몇 년 살다보면 집안 기둥뿌리마저 뽑아도 갚지 못할 형편이었다. 가르쳐 놓은 자식들이라도 있었다면, 성장한 아이들이라도 있었더라면 도회지 공장으로 보내 돈을 벌어 부쳐달라면 어찌어찌 견뎌볼 수 있겠지만 베이비붐 세대로 태어난 아들딸이 아직 크려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이 때 감행하는 것이 밤밥을 먹고 정든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는 막다른 처지가 된다. 젊은 사람들 몇 명이 서울로 도시로 가야겠다고 할 뿐 별 동요 없이 보리를 가느라 바빴고 지붕에 이엉을 얹고 해발 300이 넘는 산촌에서 지내려고 나무를 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하루살이에 가깝게 근근이 버텨내던 사람들은 꿍꿍이속이 달랐던 건가. 1977년 그해따라 가을걷이를 서둘렀다. 이상하리만치 무사태평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들어왔다. 누구보다도 부지런했던 그들이 하는 시늉만 낼뿐이다.

내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71년엔 우리 집도 서울행을 결심했다. 가재도구를 다 팔고 남 줄 것은 주고 집마저 비웠다. 그 때 아버지는 서울 동대문극장 근처 청계천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2년간 지게꾼이었던 큰형을 2년 동안 기술 배우라며 무임으로 취직시키고 우리가 살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결국 받기로 한 돈을 받지 못하는 사기를 당하자 1차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 확독-돌 절구도 대부분 떼어 갔다. 도시에 살아보지 않았기에 비슷한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이 확독-돌 절구도 대부분 떼어 갔다. 도시에 살아보지 않았기에 비슷한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다. ⓒ 김규환
겨울 초입부터 설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곡(哭) 소리 비슷한 한탄이 끊이질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연기를 피워 저녁밥을 챙겨먹고 호롱불 끄고 잠을 청한다. 말이 잠을 자는 것이지 동네 강아지마저 쿨쿨 잘 시간을 기다린다.

밥을 넉넉하게 해서는 김치에 대강 몇 술 뜨고 기다리노라면 새벽 1시 쯤 화물차가 “달달달” 덜컹거리며 마을로 진입한다. 미리 광주까지 나가서 함께 타고 온 큰아들이 차에 있으므로 다른 집을 기웃거릴 일도 없다.

칠흑 같은 그믐날 밤이다. 짐은 며칠 전부터 필수항목만 다 챙겨놓았다. 당장 입을 옷과 덮을 이불, 솥단지와 그릇 따위만 보자기에 싸서 민첩한 동작으로 비밀리에 차에 싣는다. 다 싣고 나면 세상이 숨죽이고 사람들 코고는 소리와 간혹 한두 마리 개가 “컹컹” 짖을 뿐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노인네가 있다면 모를까 앞자리엔 어른들과 막내가 타고 아이들 예닐곱 명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포대기로 바람을 막은 이삿짐과 함께 뒷자리에 쪼그리고 앉는다. 부둥켜안고 울 일도 못된다. 속으로 울고 마음으로 식구들을 위로한다.

이 엄혹한 순간에 달가닥거리는 소리나 아이 울음소리, 차 소리가 들리는 날엔 온 집안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금전적인 문제가 꼬여있으니 집안 형제들에게도 비밀로 부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고 “잘 있거라 나는 간다”며 쥐도 새도 모르게 마을을 빠져나갔다. 이웃사촌이 문안차 가보면 방문이 열려있고 불 때서 밥하는 기척도 없다. 정지는 활짝 열려있다. 무슨 일 있는지 들어가 보면 솥단지도 뜯어갔고 설강은 텅 비어 있다. 마당엔 헝겊과 지푸라기, 닭털이 나풀거린다. 엇가리는 뒤집어져 마당에 뒹굴고 있다. 확독과 절구도 떼어가고 없다.

엇가리에 있던 닭을 미리 잡아 먹기도 했고 목을 비틀어 싣고 가는 일도 있었으니 당연히 이것이 마당에 뒤집혀 있을 수 밖에.
엇가리에 있던 닭을 미리 잡아 먹기도 했고 목을 비틀어 싣고 가는 일도 있었으니 당연히 이것이 마당에 뒤집혀 있을 수 밖에. ⓒ 김규환
“밤밥 먹고 갔구먼. 어허, 이 세상이 어찌되려고 그러는지 원….”

동네방네 소문이 쫙 돌면 돈 뜯긴 사람은 울며불며 “호랭이 물어갈 집구석, 어디 잘 사나보자”는 저주를 퍼붓지만 이미 차는 떠나가고 없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각자 보리쌀 닷 말, 쌀 여섯 되, 돈 2천원, 5백 원을 셈하면 있을 때 인심까지는 잃지 않고 살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뭐라도 챙겨갈 것이 있나 살피느라 안마당, 뒤뜰을 뒤지고 다닌다. 키와 썩음썩음한 소쿠리, 벽시계, 요강 등 닥치는 대로 가져가는 게 임자였다.

이때를 두고 ‘나간 집구석’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을까 보냐. 텅 빈 집엔 5년, 10년 동안 인기척이라곤 없으니 집이 허물어지는 건 당연지사다. 다들 그렇게 떠나가서 잘 살았으면 모르되 도시 산동네 최하층을 면치 못했던 불쌍한 삶을 살았다.

밤밥을 먹고 떠난 사람들은 쉬 인정과 고향을 버렸으나 남은 사람들은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는 어디 가서 살고 있다”, “서울역에서 본 사람이 있다더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어쩌질 못했다. 5년이 지나고서는 벌초하러 한 번씩 몰래 다녀간 사람이 있다고 했고 10년이 훨씬 지나서는 명절 때 동네사람을 만나고 갔으니 모든 게 세월이 약이다. 밉다면 돈이 미운 게지. 가난이 죄인 거야.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도 떠나고 있다. 그 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서울과 수도권으로만 몰리니 걱정이 태산이다.

용인 민속촌내 방앗간. 이런 누추한 곳에 땅을 파고 살았던 사람들이 두집이나 있었다. 앞뒤 보지 않고 떠나기를 백번 잘 한 것이고 이제는 살림이 좀 피었는가 모르겠다. 그 시절은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한다.
용인 민속촌내 방앗간. 이런 누추한 곳에 땅을 파고 살았던 사람들이 두집이나 있었다. 앞뒤 보지 않고 떠나기를 백번 잘 한 것이고 이제는 살림이 좀 피었는가 모르겠다. 그 시절은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한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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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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