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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사람은 아름답다
책 읽는 사람은 아름답다 ⓒ 안준철
그날 또 한 가지 사건이 생겼어요. 오후 다섯 시쯤 혼자서 동천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술이 취해 자전거와 함께 쓰러져 있는 한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물가에 살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였어요. 저녁으로 접어들면서 매서운 칼바람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요. 할아버지를 그대로 두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일으켜 드렸어요.

할아버지는 고마웠는지 제가 어디서 사는지를 물었어요. 어디어디 산다고 대답을 하자 이번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지요. 그런데 똑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묻고 하자 조금 짜증이 났어요. 자건거를 끌고 나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드신 노인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할아버지가 혼자서 갈 수 있다고 말하자, 저는 잘 됐구나 싶어 그냥 돌아서서 다시 산책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미처 몇 걸음을 떼지 못하고 저는 다시 할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문득 제 머리에 오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지요. 그때 경황이 없다보니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말았는데, 그래서 장갑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비록 그 택시 기사는 아니지만 대신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갚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돌아가 보니 할아버지는 다시 길가에 쓰러져 있었어요. 넘어지면서 다치셨는지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자전거를 끌며 집까지 모시고 가다보니 제 겉옷과 장갑에도 피가 묻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싫었지만 마음씨 착한 택시기사를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지요. 나중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할아버지는 집에 가까워오면서 정신이 조금 드시는지 저를 빤히 바라보시며 "허허!" 하고 탄식 같기도 하고 감탄사 같기도 한 소리를 내셨어요. 고맙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하시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이런 말도 하셨어요.

"자네 아니면 오늘 나 죽었어!"

그 말을 듣자 저는 할아버지는 모시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뭉클하고 행복한 감동 같은 것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때 문득 오전에 만난 택시 기사의 기분이 이랬을까 싶었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그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

자, 어제 선생님이 경험한 이야기를 여러분께 해드렸어요. 이제 여러분이 글을 쓸 차례예요. 글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쓸 수도 있고,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쓸 수도 있어요. 지금까지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도 여러분의 글을 읽으면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써 보세요. 제목이나 주제도 여러분이 직접 정하고. 그럼 지금부터 시작!"

글 쓰는 아이들은 아름답다
글 쓰는 아이들은 아름답다 ⓒ 안준철
아이들은 약 30분 동안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서도 써놓은 글들은 모두 달랐습니다. 글쓴이가 다르니 글도 다를 수밖에요. 글도 글이지만 귀로 들은 이야기를 글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삶에 대한 따뜻하고 올곧은 생각들을 갖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것이 글쓰기 공부를 하는 가장 큰 목적이기도 하니까요. 두 아이가 쓴 글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은혜>

나는 오늘 한 남자가 겪은 이야기를 통해 은혜란 것을 배웠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우체국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리고 장갑 한 짝을 두고 내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우체국 문을 열고 가쁜 숨을 들이쉬며 허겁지겁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 남자에게 장갑을 건네주고 환하게 웃으며 우체국을 나갔다. 장갑을 받은 한 남자는 그 택시 기사가 그리워 장갑만 만지작거렸다.

이 일이 있고 난 몇 시간 후, 그 남자는 산책을 하다가 술을 먹고 취해 쓰러진 할아버지를 보았다. 일으켜서 집이 어디냐고 물어 본 후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사양하고 혼자 자건거를 몰고 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쓰러져 손에서 피가 났다. 그걸 본 그 남자는 오전에 있었던 장갑 이야기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를 일으켜 할아버지의 집으로 걸음을 향했다. 도중에 할아버지는 많이 취하셨는지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자네 집은 어딘가?" "직장은 어딘가?"라는 말을.

그 남자는 택시 기사의 은혜를 할아버지에게 갚은 것이었다. 난 이야기를 듣고 은혜란 것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 모르는 곳에 갚아진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도 은혜를 많이 베풀어야겠다.

<사랑을 전하는 장갑>

한 사내가 택시를 타고 우체국으로 갔다. 그런데 일을 보다가 장갑 한 짝을 택시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잠시 후 한 남자가 허겁지겁 가쁜 숨을 내쉬면서 우체국에 들어와 누군가를 찾았다. 그는 사내를 보더니 장갑 한 짝을 주고는 가버렸다. 한 마디의 인사와 함께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시간이 꽤 흘렀던 걸로 보아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온 것 같은데 그 사소한 장갑 한 짝을 주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택시기사에겐 시간이 돈이나 마찬가지인데 단지 장갑 한 짝을 전해주기 위해 돈을 날린 그 택시 기사. 그의 웃음과 배려가 사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였다.

몇 시간 뒤, 그 장갑을 차고 산책을 하다가 사내는 자건거와 함께 쓰러져 있는 술 취한 노인을 보았다. 그 사내는 곧장 가서 부축해주며 집까지 바래다 주려고하자 노인은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사내는 속으로 귀찮은데 잘 됐다고 생각하며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몇 시간 전의 택시 기사가 떠올랐다. 베푸는 것만 받을 수 없기에 그 사내는 그 노인을 다시 찾았다. 역시나 쓰러져 손에 피까지 묻어 있는 노인을 부축해 주었다. 집까지 같이 걸어가며 노인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하지만 술 때문인지 똑같은 질문만 했다. 그 노인의 집에 도착하자 노인은 고마운지 그 피 묻은 손으로 사내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그 사내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사랑의 장갑을 차고 다니며 남을 돕고 싶다고. 사내는 웃으며 오늘도 사랑의 장갑을 차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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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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