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함께 관두산 아래 마을인 관두량(館頭梁)은 고려시대 때 중국(송)과 교역로가 되었던 국제무역항이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인적 끊긴 포구가 되었지만 한때는 멀리 제주도와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과 무역선들이 정박해 있던 국제항이었다.《대동지지》(1865),《동국여지승람》(1481)등의 기록에도 이곳은 고려시대 중국의 남경을 왕래하던 개항지로 해남의 남쪽 4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근 이곳 일대에서 고려시대의 청자편이 발견되고 있다. 해남자기를 연구해 온 변남주(44, 청자연구가)씨는 관두량이 있던 당시 관터와 해안가에서 청자산지였던 산이와 화원지역에서 생산된 해남자기가 발견돼 당시 무역항으로서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땅속 동굴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런데 이곳 관두산에는 한 겨울에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혈(風穴)이 관두산의 정상부위에 산재해 있다. 풍혈은 바다와 접하고 있는 곳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데 큰 것은 사람 3,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여서 마을사람들은 이를 용굴이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이곳 주변에는 바위틈 사이와 평지에 마치 땅이 함몰되어 있는 것처럼 지하로 구멍이 뚫린 굴이 있는데 이 동굴로부터 특히 겨울이 되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아주 오래 전 화산폭발이 일어나고 휴화산 활동이 이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이같은 현상은 표면적으로 땅속동굴의 지열이 차가운 바깥 공기 중으로 나오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이곳 풍혈은 1년 내내 18°정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겨울이 되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눈이 내린 상태에서는 더욱 잘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의 풍혈 속에 들어가면 마치 보일러실에 들어간 것처럼 따뜻하며, 여름에는 대신 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시원하다.
이곳 관두산 풍혈은 마을사람들에 의해 전설처럼 전해져 오다 최근 외부에 알려지고 있는 독특한 지질현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두산 풍혈에 대한 기록은 1872년에 편찬한 지리지인 <호남읍지>의 해남편에 나와 있다. 또한 1925년 발행한 <해남군지>에도 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호남읍지>에 나온 기록을 보면 "굴 가운데서 찬바람이 일기 때문에 말하기를 풍혈이라고 하거니와 낙엽이 펄펄 날 정도로 그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1925년 해남군지에는 “석굴에서 바람이 나오기 때문에 풍혈이라고 말한다. 하록에서 방풍 향부자(香附子)가 난다. 월주(月洲) 박종유(朴鍾有)의 시비가 서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풍혈의 지질현상에 대해 그동안 관두산을 다녀간 지질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관두산과 인근지형은 공룡발자국이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는 우항리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곳으로 화산암과 퇴적암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우항리 공룡화석지 발굴에 참여했던 황구근 교사는 “관두산 중턱 절벽에서는 연흔(물결모양)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거대한 호수의 가장자리였다가 화산폭발이나 지각변동에 의해 퇴적암층에 절리현상이 생기면서 단열팽창에 의해 이와 같은 김서림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 이곳을 다녀간 지질학 전문가인 부산대학교 황수진 교수는 현장을 둘러본 결과 “관두산 풍혈이 조사가치가 높은 독특한 자연현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하며 “이곳은 풍혈인 것이 확실해 보이며, 밀양의 얼음골 등 비슷한 자연현상을 보이고 있는 곳과는 다른 지질 구조를 하고 있다” 면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웬 돌무더기가 이런 곳에
관두산은 산의 규모가 작지만 아마도 긴 역사성을 대변한 때문인지 찾는 이들의 발길도 잦았던 듯하다.
관두산 정상을 항해 10여분쯤 올라가면 고갯마루쯤에 바위틈에서 물길이 뚝뚝 떨어지는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마치 지붕의 처마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바위틈에서 떨어진 물이 모여 작은 샘을 이루고 있으며 비바람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진짜 샘은 이곳 너럭바위 바로 옆에 있는 샘으로 이 샘은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똑같은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산의 정상부위에 그것도 산세도 그리 크지 않은 곳에 일 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은 샘이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같은 신비함을 말해주는지 샘이 있는 바로 위에는 조그마한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비석의 아래 부분이 깨어진 채 서있는 이 비의 글귀들은 어느 문장가(시인)가 이곳을 지나다 쓴 것 같은 글귀들이 모여 있다.
1925년에 발행된 해남군지에 보이는 박종유의 시비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지만 아랫부분이 깨어진 채로 있어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 비는 관두산의 신비스러움을 노래한 듯 관두산의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샘을 지나 정상 쪽으로 올라가면 봉수대가 나온다. 지금은 봉수대를 만들었던 돌무더기의 아랫부분만 남아있는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땅 끝 쪽의 바다와 맞은편에는 진도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이같이 좋은 입지적 조건 때문에 이곳에 봉수대를 설치했던 듯하다.
이곳 봉수대에서 다시 내려와 바닷가 쪽으로 가야 풍혈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풍혈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고분을 연상케 하는 대형 돌무더기가 4,5기가 있어 의문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돌무더기들이 어떤 용도로 이러한 산 정상 부위에 조성되게 되었는지 많은 궁금증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아이들이 죽으면 돌무더기에 묻는다는 ‘독장’으로 보기에는 돌무더기의 규모가 너무 크며 돌 하나의 크기도 매우 크다.
혹시 인근 봉수대에 쓰기 위한 돌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거리가 멀며, 주변에 성을 쌓기 위해 모아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에도 주변에는 성을 쌓았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금남 최부가 제주로 떠난 포구
고려 때의 중국과의 무역항이었던 관두량은 이후에도 먼 바다로 나가는 포구의 역할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제주로 떠나기에 앞서 순풍을 기다리던 곳으로 해남의 관두량, 고어란포(古於蘭浦), 입암포(笠巖浦 화산면 가좌리 선들개), 영암의 해월루(海月樓, 북평면 남창)등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곳 관두포에는 제주를 드나들던 사람들을 위한 숙박관소인 해진성관(海珍城館)이 있었다고 한다. 1429년(세종11) 고득종(高得宗)의 건의로 개설된 것으로 알려진 이 관소는 완도의 대안(對岸)인 어란강변으로부터 10리 정도 떨어진 구산성(狗山城)안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곳은 제주와 육지와의 출입관문인 어란강에서의 출장관리의 숙박, 제주 공마(貢馬)에 대한 사료의 보급 등을 위해 설치됐다고 기록돼 있다.(세종실록11년8월)
관두량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정치인이었던 금남 최부(1454~1504)가 제주도로 가는 뱃길을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금남 최부가 쓴 '표해록'에는 이곳 관두량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그는 1487년(성종18)에 추쇄경차관(도망온 범죄인을 심판하러 오는 관리)으로 제주에 입도 했다가 부친상으로 나주로 돌아가는 길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다. 그리고 중국 절강성 부근으로 표류하여 중국에서 6개월여의 험한 노정 끝에 우리나라로 돌아와 성종의 명으로 '표해록'을 작성한다.
이곳에는 제주도로 가기 위해 이용한 뱃길이 적혀 있다. 그는 성종18년 9월17일 제주삼읍 추쇄경차관으로 명을 받고 길을 떠나 전라도에 도착, 차출한 배리(陪吏) 노자 등 8명과 함께 해남현에 도착한다. 최부일행은 풍랑으로 바로 배에 승선하지 못하고 순풍 기다렸다가 그해 11월 11일 아침에야 마침 제주에 새로 부임하는 목사 허희(許熙)와 함께 배를 타고 그 이튿날인 12일 저녁에 제주도에 도착 제주 조천관에 투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포구는 바다를 거쳐 먼 세계로의 떠남과 떠난 이들을 맞이 하는 자궁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아주 오래 전 떠남과 이별을 보듬고 지난 세월의 뒤안길에 서있던 관두산 풍혈은 지금 겨울 속에서 전설처럼 피어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