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헌책방이라기보다 도서관처럼 편안하게 꾸민 '보물섬'. 이 많은 책 속에서 보물을 건져보자.
헌책방이라기보다 도서관처럼 편안하게 꾸민 '보물섬'. 이 많은 책 속에서 보물을 건져보자. ⓒ 한성희
'보물섬' 하면 생각나는 것이 뭘까?

외다리 실버 선장, 앵무새, 해적, 지도, 그리고 럼주. 떠오르는 말들이 대충 이런 것이다. 그런데 떠오르는 단어들을 무심코 쓰다보니 뭔가 이상하다. 왜 착한 주인공들은 이름도 기억 안 나고 애꾸눈 악당이 먼저 생각나는 것일까?

'보물'이라는 환상의 신비함 때문이 아닐까?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의 우연에서 행운이 비롯된다는 무의식적인 생각과, 그래도 보물을 찾고싶다는 인간의 원시적 본능이 정상을 배제시킨 것이리라.

헌책방 문 앞에 서서 가슴 두근거리는 기쁨과 기대감을 느꼈던 시절이 있다. 비싼 책을 맘껏 사서 볼 수 없던 시절, 독서에 대한 갈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 봤을 일이다.

내 보물섬은 헌책방이었다. 그 동안 모은 돈을 들고 갖고싶은 책들 앞에서 계산하기 시작한다. 갈 차비를 빼고 나면 몇 권이나 살 수 있을까? 욕심나는 책들 앞에서 한 권이라도 더 챙기려고 빈약한 주머니 돈을 계산하며 이것저것 골라 쌓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하다보면 두세 시간은 후딱 가버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떨궈놓기 아쉬운 책들과 겨우 작별하고, 나에게 간택된 소중한 책을 끌어안고 얼른 집에 가서 펼쳐볼 기대에 돌아오는 길은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귀한 보물 건졌다는 충만한 기쁨에 가득 찼다.

새책 한 권 살 돈으로 헌책 여러 권 사보세요

옛날 10대 시절에 읽던 세계문학전집. 보물섬에서 발견했다.
옛날 10대 시절에 읽던 세계문학전집. 보물섬에서 발견했다. ⓒ 한성희
그러고 보니 헌책방에 다니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됐다. 단골로 정해놓고 다니던 몇몇 헌책방이 하나씩 사라지고 표지가 반들거리는 책이 흔해서 넘쳐나는 세상이기 때문일까? 근본적인 이유는 책을 안 읽고 있다는 증거일 거고, 필요한 책은 일반서점에서 사는 습관이 들어버린 탓일 게다.

그러나 요즘 어지간한 책 한 권 사려면 돈 만원이 후딱 넘어가니 읽고싶은 책이 있어도 망설이다 포기하고 만다. 헌책방에서 책을 산다면 신간 한 권 값으로 몇 권은 충분히 구할 텐데….

헌책방에서 보물을 건져 올리는 '두근두근 즐거움'을 다시 맛보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헌책방으로 가야한다.

경기도 파주시 출판문화도시에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운영하는 '보물섬'이 있다. 아세아출판문화정보센터 2층에 올라서면 녹슨 철제 상자들이 마치 초현대적인 설치미술처럼 늘어서 맞는다. 이 철제상자들은 다름 아닌 헌책방 '보물섬'의 책 창고다.

사람이 나오는 곳이 보물섬 입구. 녹슨 철제 사각 상자들이 헌책 보관함들이다.
사람이 나오는 곳이 보물섬 입구. 녹슨 철제 사각 상자들이 헌책 보관함들이다. ⓒ 한성희
지독하게 추웠던 지난 일요일(9일), 친구와 함께 누추하고 어딘가 어둑어둑한 기존 헌책방의 개념을 깬 깨끗하고 환한 '보물섬'으로 들어섰다. 이곳을 운영하는 보물섬 간사 이상건씨와 자원봉사자들이 해맑은 미소로 반겨준다.

보물섬은 필요 없는 책을 기증 받아 필요한 시민들이 구입하게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이곳은 나눔과 순환의 가치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가게 정신과 생태문화도시를 지향하는 파주출판도시의 정신이 의기투합해 지난해 10월 문을 열었다.

갈피갈피 마다 숨결과 손때가 묻은 소중한 책들을 폐기처분 한다면, 환경오염과 쓰레기 두 가지 문제가 나온다. 내게 쓸모를 다한 책들이 새 주인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도록 이어주는 역할을 보물섬에서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파주 어린이 책 한마당' 축제 기간에는 하루 1천명이 이곳에 몰려들어 줄을 서서 책을 구입하기도 했다. 싼값에 독서 욕구를 충족시키고 살림을 아끼려는 서민들의 마음이 아닐까. 겨울이 되면서 좀 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꾸준히 이어진다.

책을 기증 받으면 봉사자들은 우선 책을 정리하는 과정을 밟는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책갈피를 흔들면 책 주인도 잊고있던 사진, 메모지 등이 수십 년만에 발견되기도 한다.

기증 받은 책에서 나온 보물들. 1933년 크리스마스 씰도 있다.
기증 받은 책에서 나온 보물들. 1933년 크리스마스 씰도 있다. ⓒ 한성희
보물섬에서 만난 진짜 보물들

오래 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메모지.
오래 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메모지. ⓒ 한성희
1933년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 단체로 찍은 바랜 흑백사진, 10원짜리 지폐, 동창회 모임을 알리는 한자로 쓴 세로 엽서, 그리고 책을 선물한 사람의 메모지.

"생일축하 선물이 늦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 선물메뉴는 항상 무엇을 할까 망설이다 늦어지며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 이르러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제서야 새삼스레 무슨 선물이냐 하지 마시고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받아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하나이다. 78년 12월 19일(음)."

25년이 넘은 이 메모지를 읽다보니 책을 선물한 사람의 성격이 그려졌다. 생일선물을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시기를 놓치고 이 메모지가 끼워진 책을 선물한 모양이다.

늦은 선물을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받아주길 간절히 바란다니 그 정성과 심정은 이해 갔지만 왠지 웃음이 쿡쿡 나온다. 멋진 사람일 것이다.

젊은 부부 한 쌍이 예쁜 아이 손을 잡고 보물섬에 들어선다. 그리고 아동도서 코너로 곧장 가는 걸 보니 이곳에 드나드는 게 익숙한 모습이다. 아이에게 책을 골라주는 다정한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추운 날씨에도 아이와 보물섬을 찾은 젊은 부부. 왠지 아름다워 보였다.
추운 날씨에도 아이와 보물섬을 찾은 젊은 부부. 왠지 아름다워 보였다. ⓒ 한성희
아동 도서 코너에는 기증 받은 헌책과 출판사에서 증정한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책이 있다. 정가의 절반 이하면 살 수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부모들에게는 자녀에게 싼값에 책을 사 줄 수 있고 아끼고 절약하는 정신도 키워 줄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가 된다.

서가에 고개를 박고 책을 뒤지던 친구가 책 몇 권을 골라 책상에 올려놓는다. 언뜻 보니 '시의 혁명'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시의 혁명? 이거 어디서 찾았어?"
"내 거야. 손도 대지 말아."
"이 귀한 책을 찾다니 정말 보물 건졌네."

행여 내게 뺏길까 책을 건드리지도 못하게 한다. 저 책은 80년대 활동했던 남진우 유시화 기형도 원희석 시인 등 '시운동' 동인들이 펴낸 책인데 어떻게 여기서 발견됐을까. 내가 하도 탐을 내니까 책을 훔쳐 갈까봐 숨겨둬야겠다고 까지 나오는 친구에게 나중에 빌려보겠다는 것으로 타협했다. 친구가 고른 서너 권의 책값이 모두 3천원이다.

친구가 찾아낸 '보물' <시의 혁명>. 이 책을 놓고 친구와 쟁탈전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친구가 찾아낸 '보물' <시의 혁명>. 이 책을 놓고 친구와 쟁탈전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 한성희
이젠 내가 보물을 건질 차례다. 시간이 흘렀으니 나도 어서 보물을 건져야 손해를 보지 않겠지.

이곳에 있는 책은 모두 1만2000권 정도 된다. 국어대사전 같은 사전류가 2만원이고 새 책은 정가의 1/3이다. 그밖에 웬만한 책들은 500원에서 1천원이고 비싸봐야 2천원에서 3천원 정도니 싼값에 책을 사냥하고 싶은 사람의 사냥터로는 안성맞춤이다.

'게임의 여왕' '신들의 풍차'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드니 셀던의 책들은 500원이고 새 책이나 다름없는 도올의 책들도 1천원이면 구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세로체 활자의 세계문학전집을 보니 밤을 지새우며 독서하던 옛 시절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1천원이면 살 수 있는 도올의 책 코너.
1천원이면 살 수 있는 도올의 책 코너. ⓒ 한성희
비매품 전시용으로는 백낙청 교수가 기증한 도서와 자유를 찾은 리영희 교수 금서전, 이상문학상 초판본, 기증 받은 박경리의 '토지'가 있다. 그 옆에 뜻밖에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토지' 기사를 프린트해서 뽑아 놓은 것을 발견했다. 마치 식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기증 도서 <토지>의 전시 책장에 같이 전시된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기증 도서 <토지>의 전시 책장에 같이 전시된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쓴 기사. ⓒ 한성희
눈으로 보는 즐거움과 잃어버린 문학의 기억이 살아 있는 곳이 헌책방 '보물섬'이다.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과 다시 쓰는 알뜰함을 맛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책을 구입하러 오는 길에 자신이 필요없는 책을 직접 가져와서 기증하기도 하지만, 많은 책을 기증한다는 연락이 오면 직접 책을 인수하러 간다고 한다. 아름다운 가게에서는 보물섬에서 얻은 수익금의 사회환원사업으로 '해외책보내기'를 1차로 끝냈고 '산간도서지역 책보내기'를 계획하고 있다.

아름다운 가게 '보물섬'의 이상건 간사와 책들.
아름다운 가게 '보물섬'의 이상건 간사와 책들. ⓒ 한성희
이곳은 이상건 간사와 자원봉사자인 김은희씨, 이만복씨 등 5명의 봉사자들이 문을 닫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오전 11시에서 오후 6시까지 찾아오는 시민을 맞는다.

"우리 오늘 여기서 진짜 보물 건졌다, 그지?"
"그래, 앞으로 자주 오자."

돌아오는 차안에서 무릎 위에 펼쳐놓은 오쇼 라즈니쉬의 '장자(莊子), 불사조를 말한다' 1, 2권을 쓰다듬었다. 한 권에 천 원씩 주고 건진 오늘의 내 보물들이다.

덧붙이는 글 | <아름다운 가게 '보물섬'으로 가는 길>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문산 방향으로 20여분 가량 달려 일산 신도시를 지나 파주출판도시 전용진입로에 들어서면 된다. (문의 031-955-0077, 02-3676-1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