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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제국호텔>
이문재의 <제국호텔> ⓒ 문학동네
우리 사회가 거쳐 온 1970년 혹은 1980년대와 2000년대의 세상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기준은 무엇일까. 다양한 기준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주된 경제적인 수단이 되는 산업이 무엇인가'하는 물음도 그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의 시대를 산업화시대 그리고 뒤의 시대를 정보화시대라 구분한다.

잠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들여다 보자. 이미 정보화시대의 세계는 각종 정보 네트워크로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과거에는 만화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꿈을 안겨 주었던 그 상상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는 이미 현실의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정점 혹은 종점은 없는 듯 달리기만 하고 있는 '정보화시대'라는 열차에 대해 우리는 반성해 본 적이 있었는가? 정보화시대가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산업화시대의 반성'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한 반성 또한 필요할 때가 아닌가 한다.

시인 이문재의 네번째 시집 <제국호텔>은 그러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제국호텔'이라는 시집 제목, 그리고 부제만 달리한 같은 제목의 <제국호텔>이라는 다섯편의 시를 통해 시인은 이 시대를 성토한다. 시인이 바라본 세상 속의 우리들은 인터넷의 세상 '@'에 갇혀 있고 또 다른 무언가에 갇혀 있다.

이곳 원주민들은 @에 모여 산다.
@ 뒤에서 가을이 민첩하다 분주하다
전국의 활엽수들이 사 일 만에 낙엽을 생산했다
비밀번호 정책은 대성공이었다
원주민들은 너도나도 비밀번호를 만들었다
저들은 자신의 비밀번호에 갇힐 것이다
디지털 정책은 완벽 완전하다
@에 불이 들어와 있다
- <제국호텔> (부제:'비밀번호')중에서(p.51)


시인이 성토하는 '제국호텔'은 때로는 다국적기업을 때로는 서양의 헤게모니이다. 또 때로는 정보 네트워크 등을 포함하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모습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현장에 서서 원초적이며 시적인 감수성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시인이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시인은 '더 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다'라는 부제가 달린 또 다른 <제국호텔>이라는 시를 통해 이 '세계'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혐오적인 공간 '제국호텔'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시인은 과거로 돌아가는 탈출을 선택한다.

밥과 입 사이에
우주가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문명도
밥과 입 사이를
좁히지 못했다

- <시인과 농부> 중에서(p.128)


시인이 선택한 '과거로의 탈출'은 원초적이고 육체적 세계를 향한 탈출이다. 그가 바라본 '제국호텔'이라는 이름의 세상이 육체성 혹은 자연에 대한 그리움에서 출발하는 문제 제기였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원시적 세계로의 회기가 결코 낯설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 그 어떤 문명도 / 밥과 입 사이를 좁히지 못했다'는 시의 일부분처럼 그가 원하는 세상은 근대 과학이 만들어낸 객관적인 지식에 의해 통제되는 세상이 아닌 '나'의 몸이 느낄 수 있는 주관적인 세계이고 느낌의 세계이다.

시인이 성토했던 '제국호텔'은 늘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서 그 시어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는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독특한 재미를 안겨 준다. 또 이에 못지 않게 시인이 바라보는 시선의 다양성 역시 흥미롭다. 그의 시선은 때론 광화문의 붉은 악마에게 있고, 때론 들판의 파꽃에도 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의 한 가운데로 흐르는 것은 물론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마침내 언플러그드 / 빈틈없는 어둠 / 꿈 없는 잠 / 나는 탈주에 성공한 것이다'(<비박> 중에서)고 자신있게 말하는 시인, 그는 분명 아직도 이 네트워크 시대, 그 '제국'의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시를 써 내려갈 것이다.

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이 자서(自序)에서 "우리 몸이건, 항아리건 비우기나 채우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몸 자체, 항아리 자체이다"라고 말한 이유를 말이다. 또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난생 처음으로 심호흡을 한다"라고 밝히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제국호텔

이문재 지음, 문학동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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