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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으로 비경 이룬 한라산
설국으로 비경 이룬 한라산 ⓒ 김강임
"1100도로 소형·대형 통제. 5·16도로 소형 통제, 대형 체인"

16일 제주도의 휴일은 펑펑 쏟아지는 눈으로 아침을 열었다. 한라산으로 통하는 길은 이미 막혀 있었다. 그나마 5·16도로는 겨울 산을 동경하는 마니아들에게 희망이었다.

아침 8시.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은 벌써 산사람들의 하얀 입김이 뚝 떨어진 아침기온을 녹이고 있다. 눈과 코만 드러낸 등산객들은 온몸을 등산장비로 변신을 해서 누구 누군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런 만원버스는 처음 타 봤다. 그 만원버스의 승객은 모두 한라산을 동경하는 사람들이었다. 손과 발이 모두 사람과 사람으로 묶여 있는 듯, 산사람을 가득 태운 시외버스는 제주대학교를 벗어나자 눈 속을 달리고 있었다.

눈을 지고 있는 해녀상
눈을 지고 있는 해녀상 ⓒ 김강임
해발 750m 성판악 휴게소

11번 국도인 5·16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연결하는 도로로 한라산 허리를 관통한다. 봄에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천국을 이루며, 여름에는 시원한 숲을, 가을에는 단풍터널을 제공하는 곳이 바로 5·16도로이다.

특히 5·16도로 해발 750m에는 한라산 등산로 성판악 코스가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성판악 코스는 등산로가 완만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코스로 정상인 백록담까지 갈 수 있는 특혜가 있다.

"오늘은 기상관계상 정상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등산객 여러분께서는 1500고지인 진달래 밭까지만 등산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들려오는 안내방송은 신발에 아이젠을 묶고 있던 등산객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아뿔싸! 백록담 정상의 순백의 아름다움을 담아보기 위해 달려왔는데…."

그러나 이 실망감도 등산로로 접어들면 곧 잊어버리게 된다. 겨울 산행은 무엇보다도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아이젠은 물론이고 겨울 등산복을 꼭 갖추어야 한다.

물론 성판악 휴게소에서 아침 요기를 취할 수 있는 '오뎅'(어묵)과 국수, 라면 등이 준비돼 있으며 진달래 밭에 가면 컵라면을 사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등산 도중에 요기를 취할 수 있는 따뜻한 물과 컵라면, 빵, 초콜릿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성판악 휴게소 해녀는 물허벅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밤새 내린 하얀 눈을 등에 지고 있었다. 폭설이 내린 한라산을 뚫는 등산객들은 줄을 지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등산객의 행렬
끝없이 이어지는 등산객의 행렬 ⓒ 김강임

마치 누군가가 구령을 하는 듯

하늘에서는 백설기 같은 하얀 눈가루가 계속 퍼부어졌다. 그러나 겨울 등산은 한치의 게으름을 피울 겨를이 없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행렬에 조금이라도 늑장을 부리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방해를 주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구령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 둘- 하나, 둘-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는 질서가 있다. 그 발걸음의 속도와 스피드 또한 모두가 일정하다. 한 마음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상도 사람, 충청도 사람, 전라도사람, 앞사람과 뒷사람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어느 부지런한 사람이 눈을 치워놓았을까? 폭설 속에 등산로를 만들어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도 겨울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등산로는 겨우 한 사람이 올라갈 정도밖에 여유가 없다. 그래서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겨울 바람은 방향 감각도 없이 불어댔다. 코 속으로, 입 속으로 하얀 눈이 들어간다. 벌써 눈썹은 흰눈으로 분장을 해 버렸다. 신선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라산을 두고 영주산이라 불렀던가?

눈속에 묻혀있는 표지석
눈속에 묻혀있는 표지석 ⓒ 김강임
해발 800m. 눈 속에 묻혀 있던 표지석은 누군가가 손으로 쓸어내린 흔적이 있다. 내가 얼마나 걸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그리고 어디서 한번쯤 쉬어갈 수 있는지, 계획을 세워볼 수 있는 것이 표지석이다.

표지판에 새겨진 ' You are here'
표지판에 새겨진 ' You are here' ⓒ 김강임
'You are here'

내가 서 있는 현재의 위치는? 1.3km를 걸어온 사람에게 던지는 이 표지판의 메시지는 갑자기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산행 중 자주 보는 글자이지만 현재의 내 위치를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아주 짧은 표시판이다.

"그래! 내 현재의 위치?"

나라는 존재를 가끔 잊고 살아온 나에게 내가 현재 서 있는 위치를 굳이 설명한다면 나는 출발선에서 얼마나 달려왔을까? 그리고 내가 정해 놓은 목적지는 어느 곳일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목적지를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걸음이 느려진다. 그리고 '나는 얼마만큼 걸어왔을까?'라는 메시지를 마음 속에 담아 하나의 직선을 그어본다. 그러나 방향도 없이 불어대는 겨울바람에 내 마음조차 흔들린다.

솜같이 포근한 흰눈으로 싸여
솜같이 포근한 흰눈으로 싸여 ⓒ 김강임
눈 앞에 펼쳐지는 설국은 고민에 빠져 있는 나를 건져주었다. 영주산, 그래서 이 산을 두고 신이 살았다 했던가?

가까스로 남아 있는 가을 낙엽을 감싸고 있는 하얀 눈이 명주솜처럼 포근하다. 가지마다 엉켜 있는 눈꽃송이. 정말이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나를 채찍질했다.

삼나무 숲이 가득한 속밭풍경
삼나무 숲이 가득한 속밭풍경 ⓒ 김강임
또 다른 설국의 비경은 삼나무가 가득한 속밭에서 펼쳐졌다. 절반을 왔다는 안도감에 여유를 부릴 때,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있는 삼나무 숲은 용기를 준다.

산은 산인데 산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 속밭은 아늑했다. 목도리를 풀고 속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추억을 한 컷씩 담아보기 위해 저마다 어색한 여유를 부린다.

나무가지 끝에는 겨울이 달려있다.
나무가지 끝에는 겨울이 달려있다. ⓒ 김강임
겨울나무가지 끝에는 하늘에서 내린 눈이 만든 겨울 열매가 맺혔다. 산은 산인데 성판으로 오르는 겨울산은 산이 아니다. 그저 한없이 펼쳐진 설국이 눈앞에 펼쳐질 뿐, 산이 보이질 않으니 말이다.

산 속에 내가 서 있는데도 산이 보이지 않는 겨울산. 그것은 마치 내 마음을 내가 보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산에서는 산을 볼 수가 없다.
산에서는 산을 볼 수가 없다. ⓒ 김강임
성판악 입구에서 속밭까지 3.5km는 1시간 30분 걸었다. 벌써 아침 일찍 산행을 서두른 사람들은 하산을 한다. 내려오는 사람들은 한라산을 보았을까? 하얀 눈 속에 숨어 있는 겨울산은 그저 말이 없다. 설국으로 장관을 이루었을 뿐.

성판악에서 속밭까지 3.5km
성판악에서 속밭까지 3.5km ⓒ 김강임
속밭에서 진달래 밭까지는 3.8km가 남았다. 현재 위치를 말해주고 있는 표지판을 바라보는 순간, 목적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다시 스피드를 내기 시작한다.

겨울산행에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은 바로 표지판에 새겨진 'You are here'가 주는 메시지였다.

덧붙이는 글 | 1월 16일 한라산에 다녀왔습니다. 눈꽃으로 비경을 이뤘으나, 정상은 통제되어 있었습니다. 성판악에서 진달래 밭까지 겨울 산행을 3차례에 걸쳐 기사로 실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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