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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위해 열변을 토하는 문익환 목사. 2005년 분단 60년을 맞는 이 겨울에 "통일은 다 됐어"라는 그 음성이 눈물겹도록 그립다.
통일을 위해 열변을 토하는 문익환 목사. 2005년 분단 60년을 맞는 이 겨울에 "통일은 다 됐어"라는 그 음성이 눈물겹도록 그립다. ⓒ 통일맞이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문익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중에서


1989년 1월 1일. '잠꼬대 아닌 잠꼬대'란 시를 썼던 늦봄 문익환(1918-1994)은 그로부터 불과 석달여가 지난 3월 25일 유원호, 정경모씨와 함께 '금단의 땅' 평양으로 갔다. 시에서 밝힌 그대로였다.

평양을 방문한 늦봄이 "분단 50년을 넘기는 것은 민족의 치욕이다. 해방 50주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만들자"고 말하자, 김일성 주석이 동의하고 나섰고, 그 뒤 남과 북, 해외에선 1995년을 '민족의 희년', '통일의 원년'으로 만들자는 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방북 중에 문익환 목사는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회담을 하고, 연방제 방식과 자주·평화·민족대단결에 의한 통일 원칙 등 9개 항이 담긴 '4·2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늦봄 문익환의 통일 노력에 당시 남쪽 정권(노태우 정권)의 반응은 혹독함 그 자체였다. 늦봄은 귀국 전부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으며, 1989년 4월 13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즉시 구속 수감되었다. 당시 늦봄의 나이 71세였다.

1989년 6월 26일. 방북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는 검사보다도 더 통렬한 문익환 목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찬양·고무했다. 맨날 욕하고 그러면서 통일이 되겠어? 상대방의 좋은 점을 자꾸 찾아내 찬양 고무해야 하지 않겠어."

이 재판에서 늦봄은 자신의 통일관을 모두진술로 이렇게 표현했다.

"분단 45년, 나는 이 45년이라는 것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얼마나 못났으면 남들이 들어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그어놓은 선, 그게 뭔데 지우지 못하고 1백만의 군대를 남쪽과 북쪽에서 무장시켜 그것이 지워질세라 지키고 있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고 생각한다.(중략) 그래서 실정법을 어기면서 평양에 갔다 왔다. 45년 비극의 수치를 씻어내고 45년 분단의 비극을 청산하고 싶어서 갔다 왔다. 무엇이 잘못인가?"

방북사건으로 투옥됐던 늦봄은 19개월 만인 1990년 10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뒤에 더욱 왕성하게 통일의 절박함을 온몸으로 선언했다.

"통일은 다 됐어! 통일은 다 됐어요."

대학 운동장에서, 강당에서, 교회에서, 집회 현장에서, 단체 사무실에서도….

늦봄 문익환 목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통일의 전망과 희망을 증언했다.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는 마치 통일을 위해 '거듭난' 예언자의 모습이었다.

늦봄 11주기 기념 행사들

○ 늦봄 문익환 목사 11주기 기념사진·유품전

기간 : 2005년 1월 18일부터 1월 22일까지
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시관(시청역 배재학당 건물 1층)

○ 늦봄 문익환 목사 시비건립 추진위원회 발족식 및 사진전 개막식

일시 : 2005년 1월 18일 저녁 6시
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시관 및 교육관

○ 북녘 영화 “심장에 남는 사람” 상영

일시 : 2005년 1월 22일 오후 2시
장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시관 / 이민우
늘그막에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해서 '늦봄'이란 호를 썼다는 문익환 목사는 시인의 감성과 열정을 통일운동과 접목시켜 강연이나 집회에서도 직접 지은 시를 들려주곤 했다.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이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 중에서


역사를 산다는 건,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임을 강조한 늦봄은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결국 늦봄은 1991년 6월 6일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강경대 열사와 박창수 열사 등 많은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하던 중 형 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됐다. 여섯번째 투옥이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의 탄압도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실천의 칼날을 무디게 할 순 없었다. 오히려 갇혀서도 밖에 있는 '동지'들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주던, 늦봄 문익환은 1993년 3월 출소 환영식 자리에서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감옥에 여섯 번 갔다 왔는데, 6전 7기란 말은 없잖아요. 통일을 위해 한 번 더 감옥에 가서 7전 8기해야겠어요."

늦봄 문익환 목사
늦봄 문익환 목사 ⓒ 통일맞이
늦봄은 1993년 7월. 제4차 범민족대회 남측 추진본부 본부장으로 범민족대회를 준비하며 이렇게 호소했다.

"큰 장벽을 허물기 전에 작은 장벽부터 하나 하나 허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뜻을 세우기 전에 작은 뜻부터 하나 하나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통일을 이루기 전에 작은 통일부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이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통일운동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해외에서도 통일운동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통일된 통일운동이 남과 북, 해외, 이렇게 삼면에서 분단을 무너뜨리려고 같이 조여들어 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라던 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와 강당, 감옥을 누비며 1995년까지 통일의 실마리를 풀지 않으면 또다시 외세에 크게 흔들릴 것이니 "온 겨레가 통일에 떨쳐나서자"고 호소하던 늦봄 문익환 목사.

그처럼 통일의 한 길을 거침없이 내달리던 늦봄은 1994년 1월 18일, 아픈 가슴 부여안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해 1월 22일 '겨레장'으로 치러진 늦봄의 장례에는 "통일의 날 돌아오소서"란 만장이 펄럭였고, 상여 위에는 태극기 대신 흰 바탕에 파란색의 한반도지도가 그려진 깃발이 놓였다. '남북단일기'였다.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각계인사들이 애통해 하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 아니 "통일은 됐어, 통일은 다 됐어요"라고 외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그런데 어느 덧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의 지도자가 손을 굳게 잡으며, 6·15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또 금강산과 평양을 관광객이 오갈 수 있게 되었으며, 비전향장기수들의 북송이 이뤄졌고, 개성에서 만든 냄비가 바로 그날 서울에서 팔리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민족에게 수많은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역사를 안겨준 분단의 사슬,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건재한 채 통일인사들을 가두고,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지난 해 12월 여의도 국회 앞에서 1천명이 넘는 각계 인사가 노상 단식을 벌였으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우두머리들의 야합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는 무산되었다.

올해로 해방 60년 주년이자, 분단 60주년이다.

늦봄 문익환 목사의 11주기에 진정 늦봄의 뜻을 온전히 기린다는 것 어떠한 의미일까.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 폐지와 6·15공동선언의 구체적 실천이 요구된다. 지금은 재산의 유무를 떠나 노선의 강온을 넘어 과감한 연대와 협력으로 민족 통일을 위한 힘과 지혜를 모아낼 때다.

58세에 민주화와 통일의 투사 되다
짧게 살펴보는 늦봄 문익환 목사의 삶과 투쟁

▲ 여섯 차례의 투옥 생활에서 문익환 목사가 입었던 수의와 수번들
ⓒ통일맞이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화룡면 명동촌에서 아버지 문재린(1985년 작고)과 어머니 김신묵(1990년 작고)의 3남 2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명동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국내에서 나가는 애국지사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었다. 조국을 잃은 민족의 울분과 민족해방에 대한 희망이 섞인 땅이 그가 세상에 나온 곳이다.

문익환은 한인들이 세운 공동체학교인 은진중학교를 다니다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5학년 때 신사참배 문제로 동맹휴학에 가담하고 나서 학교를 중퇴,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용정 광명학교에 다녔다.

1938년엔 일본 도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가 학병을 거부하고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여 만주 일대에서 교회전도사로 일하던 중 해방을 맞아 1946년 귀국했다. 그 뒤 부모가 있는 김천 구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도 하고 부친이 세운 배영중학교 영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과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됐으며, 1968-1976년엔 한국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처음으로 함께 만들어 지금도 천주교에서 사용중인 <공동번역성서> 번역실장을 역임하였다.

한빛교회와 갈릴리교회 등에서 목사생활을 하던 늦봄이 박정희 유신독재의 칼날 앞에 몸을 들이댄 때는, 절친했던 재야지도자 장준하가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이 억울하게 사형 당한 1975년 여름이다.

이후 58세 때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을 첫발로 '화려하면 화려하다 할' 여러 차례에 걸친 옥살이를 시작했고, 집 거실 벽엔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글귀가 붙었다.

1976년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으로 시작된 그의 감옥살이는 1978년 유신헌법비판성명서 발표, 1980년 5월 '내란예비음모죄' 투옥, 1986년 인천5·3항쟁과 서울대 연설사건, 그리고 1989년 3월 26일 전국을 뒤흔든 방북사건, 1991년의 '분신정국'으로 재수감 될 때까지 계속 됐다.

이후 1993년 제4차 범민족대회 남측 추진본부 본부장을 역임하는 등 대중적 통일운동의 전개를 위한 실천과 모색을 계속하던 늦봄은 1994년 1월 18일 오후 8시 20분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 이민우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참말로](www.chammalo.com)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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