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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X파일 봤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으레 한마디씩 건넬 만큼 연예인 X파일은 요즘 장안의 최대 화젯거리이다. 하기야 그럴만도 하다. 오프라인에서는 스포츠 신문의 옐로우 저널리즘에, 온라인에서는 포털 뉴스의 선정적 편집에 한껏 길들어있던 독자들에게 연예계 뒷담화가 종합 선물세트처럼 푸짐하게 안겨졌으니 이 어찌 흥미롭지 않으랴.

게다가 연예인 이름을 감질나게 영문 이니셜로 표시해서 추측만 무성하게 만들던 종전의 연예계 기사들과 달리 인기 스타들의 실명이 액면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화끈한 일인가.

행여나 아직까지 못보신 분들을 위한 언론의 배려는 또 어떠한가. 가장 구미가 당길 만한 내용들을 찔끔찔끔 흘려주면서 호기심을 자극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기어코 찾아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모든 언론이 이 문서의 독자층 확대를 위해 솔선수범에 나섰으니, 장담컨대 연예인 X파일은 2005년 한국을 강타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일찌감치 예약해 놨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X파일이 어디 이것 뿐이랴. 과거 노태우 정권 시절에 보안사가 재야 인사와 야당 정치인들을 사찰하기 위해 작성한 X파일이 폭로된 것도 벌써 15년 전 일이다. 불과 몇 달 전에는 보안사의 후신인 국군기무사 산하 공안문제연구소가 소설, 논문, 사회과학 서적 등에 대한 X파일을 작성해 왔음이 밝혀져서 쟁점화 된 일도 있었다.

증권가에 은밀히 나도는 주요 기업이나 재계 인사들에 대한 X파일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이다. 비록 인기 스타들의 X파일만큼 호기심과 흥미를 잔뜩 자아내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류의 X파일은 늘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재벌 등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일이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서야 X파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딴 세상 뉴스거리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알고 보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X파일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보화의 진행과 함께 개인의 프라이버시 정보가 곳곳에서 암암리에 수집되고 있는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당신의 쇼핑내역은 지금도 기업의 고객 DB에 차곡차곡 쌓여지고 있다. 이 기록이 당신의 기본적인 인적 정보와 결합되면 현재의 당신의 생활수준과 소비패턴, 개인적 취향까지 말해주는 X파일이 생성된다.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도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끊임없이 관찰되고 있다.

합법적인 CCTV와 불법적인 몰래카메라에, 심지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눌러대는 누군가의 디카나 폰카에 우연히 찍히는 것까지 합친다면 당신의 모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어딘가에 노출되고 저장되고,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또 다른 X파일이다.

당신의 X파일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X파일 역시 유출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연예인 X파일을 희희낙낙 돌려보며 말초적 자극이나 충족시키고 앉아있을 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피해 연예인들은 X파일의 작성자인 제일기획과 동서리서치를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는 보도가 나갔다. 이 사건의 가장 핵심인 프라이버시 침해가 혐의 사항에 빠져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행 개인정보보호 관련 법률은 공공기관과 전기통신사업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제일기획과 동서리서치 같은 기업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 넌센스가 빚어진 것이다. 진작부터 시민단체에서 주장하던 보다 포괄적인 차원의 '개인정보보호기본법'의 필요성이 현실로 입증된 대목이다.

일찍이 OECD는 '프라이버시 보호와 개인정보의 유통에 관한 가이드라인' 8원칙을 만들어 각국들로 하여금 이를 준수하도록 권고해 왔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이번 연예인 X파일이 OECD의 8대 원칙에 어떻게 위배되는가를 비교, 정리해보았다. X파일만 열심히 읽지 말고 이것도 한번 꼼꼼히 읽어 보시라.

1. 수집 제한의 원칙 :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개인정보를 수집할 때는 적법하고 공정한 수단에 의해야 하며 적절한 상황에서 정보 주체에게 알리거나 동의를 구해야 한다.

⇒ 연예인 X파일은 일부 연예부 기자들의 주관적 평판을 바탕으로 작성되었기에 공정한 수단에 의하지 않았으며, 연예인 당사자들에게 알리거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밟지 않았기에 '수집 제한의 원칙'에 위배된다.

2. 정확성의 원칙 : 개인정보(데이타베이스)는 사용 목적에 부합해야 하고, 사용 목적에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정확하고 완전하며 최신의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

⇒ 연예인 X파일은 연예가에 떠도는 뜬소문들을 객관적인 검증이나 사실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문서로 구성하였기에 '정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3. 목적 명확화의 원칙 : 개인정보를 수집할 때는 수집시 그 수집 목적이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하고 이후 이를 사용할 때는 애초 목적과 모순되지 않아야 하며 사용 목적이 변하는 각각의 경우에는 다시 명시되어야 한다.

⇒ 연예인 X파일은 광고주의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명시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애초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용도로 회자되고 있다. 이는 정보 수집자가 '목적 명확화'의 원칙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했다고 할 수 있다.

4. 사용 제한의 원칙 : 개인정보는 정보 주체의 동의가 있거나 법률 규정에 의하지 않고는 수집 당시 목적 이외의 용도로 누출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 연예인 X-파일은 정보 주체의 동의나 법률 규정과 무관하게 누출되었으며, 누출의 동기도 수집 당시의 목적과 무관하였기에 '사용 제한의 원칙'에 위배된다.

5. 보안 확보의 원칙 : 개인정보의 유출, 권한 이외의 접근·파괴·사용·수정, 누출 위험에 대비하여 합리적인 보안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 연예인 X파일에 대한 보안이 허술했음은 더이상 논의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특히 정보 보안이 해킹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내부 정보 관리자의 보안 의식이 보다 중요한 사항임을 일깨워 준다.

6. 공개의 원칙 : 개인정보에 관한 개발, 운용 및 정책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공개 정책을 취하여야 한다. 개인정보의 존재와 특성, 주요 사용 목적과 함께 정보 관리자의 신원과 주소를 쉽게 알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

⇒ 연예인 X-파일의 내용을 제공한 연예부 기자들은 애초에 해당 기업이 자신들을 인터뷰한 목적을 명확히 알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연예인들의 개인정보가 수집되는 과정에서 '공개의 원칙'이 준수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7. 개인 참가의 원칙 : 정보 주체인 개인은 정보 관리자에게 자신과 관련된 정보가 있는지 없는지 존재를 확인하고, 합리적인 시간 안에 과도하지 않은 비용과 합리적인 방식, 그리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자기 정보를 열람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정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삭제·정정·보완·수정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

⇒ 연예인 X파일에 수록된 당사자들이 이러한 파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한 것은 이미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이후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수준에서 자신의 정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그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단계를 넘어 버렸다.

8. 책임의 원칙 : 정보 관리자는 위의 원칙들이 지켜지도록 필요한 제반조치를 취할 책임을 진다.

⇒ 연예인 X-파일이 몰고 온 사회적 파장에 대하여 제일기획과 동서리서치는 서로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두 업체 모두 '책임의 원칙'을 무시한 무책임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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