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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의 천불천탑이여!
성형의 시대에 뭘 믿고 못생긴 얼굴 그대로 우리 곁에 남아 가슴을 징징 울리는가?

▲ 천불산에서 내려다 본 운주사,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천불천탑을 꿈꾸었을까?
ⓒ 한석종
운주사의 온 산과 계곡에는 한결같이 못나고 투박하지만 마치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형제,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처럼 이물 없고 정겨운 불상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이곳에는 우리네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토속적이고 해학적으로 표현된 부처들이 한 가정을 이루듯 여기저기 무리지어 살고 있다.

이곳 운주사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요사체도 화려한 단청과 육중한 현판이 짓누르는 산문의 위엄도 없으며 힘없는 가슴 철렁이게 만드는 험상궂은 사천왕의 기개도 없다. 그러나 여느 절에서도 엿볼 수 없는 토속적인 조형미와 해학이 넘치는 불상과 탑 등이 서로 부둥켜안고 천불천탑의 가공할만한 설화에 이끌려 그 신비로움을 더해 주고 있다.

운주사는 도선 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만을 간직한 채 창건에서 폐사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입증해 줄만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어느 시기, 어느 누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거대한 천불천탑을 조성하려 했는지 설화만 무성할 뿐 그 실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천불천탑을 일으켜 한 시대를 찬란하게 풍미했던 운주사는 어느 시기엔가 철저하게 몰락하고, 지금은 17기의 석탑과 석불 70여구만이 쓸쓸히 남아 세찬 칼바람을 맞고 있다. 주변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운주사는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현재보다 훨씬 많은 탑과 불상들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폐사에 이르자 너나없이 탑과 불상을 뜯어다 묘석상이나 주춧돌, 디딤돌 등으로 썼고, 더러는 담벼락을 쌓는데 석축돌로 이용했다고 한다.

▲ 팔작지붕의 돌집에 두분의 석불이 등을 마주하고 정답게 앉아있다.
ⓒ 한석종

▲ 석조불감 전면에 모셔진 석불의 모습이 정겹고 천연덕스럽다.
ⓒ 한석종

▲ 석조불감 후면에 모셔진 불상의 모습이 투박하지만 인간미가 넘친다.
ⓒ 한석종
운주사에 들어서면 거칠고 황량하면서도 어떤 열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느낌은 가히 파격적이고 집단적 미의식에서 오는 것이다. 석불 하나하나의 개체가 보여주는 뛰어난 아름다움 보다는 똑같은 형상들이 반복적으로 펼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마치 사월 초파일날 거리를 가득 메운 연등행렬에서, 민주화의 열망을 안고 가두로 뛰쳐나온 시위 군중에서처럼 작은 것들이 무리를 지어 큰 힘을 발휘할 때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증폭력에 휩싸여 감동을 받게 된다.
<이태호, 운주사>

운주사의 불상과 탑은 해학적이고 파격적인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탑들의 형상이 마치 항아리나 항아리 뚜껑을 얹어 놓은 모양, 맷돌을 얹어 놓은 모양,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올린 모양 등 전혀 뜻밖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괴이하다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우리들에게 지극히 편안하고 친근한 조형미를 안겨준다.

▲ 얼굴 모양이나 크기도 다르고 표정도 각양각색이지만 낯설지 않고 순박한 모습들이다.
ⓒ 한석종

운주사의 불상들은 천불산 각 골짜기의 비로자나부처를 주불로 삼고 주변에 불상이 집단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상들은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 코, 입, 귀를 해학적으로 확대시키거나 단순하게 조각하였을 뿐 그 외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얼굴 모양이나 크기도 각양각색이어서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감이 묻어난다.

수인도 규정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기발하고 자유분방하게 조각되어 귀족적인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한 무더기의 단조로운 모습 속에서도 천차만별의 다양한 개성과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 우리가 늘 만나는 이웃집 할머니처럼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 한석종

▲ 한 낱 미천한 머슴도 미륵부처가 되어 중생들을 극락왕생으로 구도하고 있다.
ⓒ 한석종
전제왕권시대 귀족불교의 정수인 경주 석굴암 본존불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과 경계심이 동시에 느껴지는데 이곳 운주사의 못생긴 돌부처와 마주하면 이 얼마나 정겹고 편안한가! 석굴암 본존불의 위엄 앞에서 자신이 더욱더 작고 초라해져만 가던 어느 촌부라도 운주사의 못생긴 돌부처 앞에서는 극락왕생의 한줄기 희망의 빛이 잡힐 듯하다.

▲ 우리 이웃을 닮은 좌상과 입상이 소박하고 친근한 미소로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 한석종

▲ 우리네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토속적이고 해학적으로 표현된 부처들이 한 가정을 이루듯 여기저기 무리지어 살고 있다
ⓒ 한석종

▲ 우리조상들은 누워 있는 이 천번째 부처가 일어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 한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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