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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든다
저는 남들은 10주만에 끝내는 훈련을 28주나 받는 병과라 최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제가 배속된 부대는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부대였습니다.
처음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는데 고참들이 석탄창고 뒤로 불러내 곡괭이로 때리는 일도 있었고, 그 충격으로 며칠씩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그런 고참이 제대를 하고 나서부터는 부대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습니다. 당시는 군대란 곳이 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나 제대 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부대는 외딴 곳에 소재한 독립 중대였고, 이런 부대는 통상 관리가 안 돼 문제가 많다고 했으나 제가 복무할 동안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지방색에 의한 파벌이나 고참들의 구타도 거의라고 할 정도로 없었습니다.
거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머리를 쥐어박는 것도 구타라면 그런 일 정도야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등학생 시절 선도부들이나 선배들에게 맞은 것보다 구타가 적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인원구성도 서울,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으로 다양했으나 지방색 때문에 갈등이 있었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면서 군 입대 전 어느 지역의 사람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해준 선배들의 조언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행정병으로 복무했으나 일반내무반에서 생활하며 경계근무도 했기 때문에 분위기를 잘 알았습니다. 복무할 당시에도 인근 부대에서 복무하는 사람들은 저에게는 생소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대사람들은 매일 밤 부대주위의 밭에서 옥수수를 꺾어다 쪄 먹었다는 이야기도 했으나 우리 부대는 그런 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 부대 주변에도 계절 따라 옥수수나 감자가 지천으로 있었으나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으니 가을이 되면 주변 농민들이 고맙다며 특별히 떡과 술을 준비하여 부대로 전달하러 왔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부대의 전통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영회 하는 날 기합 준 소대장
이런 분위기가 한동안 바뀐 것은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고참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무렵 소대장 한 분이 전입되어왔는데, 그 분은 소위에서 중위로 갓 진급하고 부임하여 왔으니 군 생활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위치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불편한 BOQ(장교숙소)에 거쳐 하시는 그 분을 위해 환영회를 열었습니다.
군대에서 그것도 사병들이 돈을 모아 준비한 환영회였던지라 풍성하지는 않았겠지만 성의껏 준비했고 환영회에 참석한 그 분 또한 그런 일은 처음이라며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취침시간 직후였습니다. 점호가 끝나고 보초 나갈 사람은 보초를 나가고 불침번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드는데, 그 분이 완전군장의 비상을 건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리더십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 환영회하는 날 군기를 잡는 것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분은 별다른 잘못도 없는데도 무지막지하게 구타를 했습니다. 구타를 하는 것도 자신은 앉아 있으면서 상대가 자신의 군화에 머리를 부딪치게 하는 등 장난하듯 사람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약하게 부딪히면 약하다고 때리고 세게 부딪히면 반항한다고 때렸습니다.
이 분이 소대장이었지만 저와는 동갑이라 틈만 나면 구타문제는 휴가 가는 사람이 용산이나 청량리 TMO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으나 변화의 조짐은 없었습니다.
데이트 하는 데 기쁨조 데리고 간 소대장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제가 상황근무를 하고 있는데 기타 잘 치는 사람을 자기 집으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기타를 배우면 구타도 적어지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 사람을 보냈는데, 기타 치러 갔던 사람이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씩씩거리며 돌아왔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그가 소대장 집에 갔더니 애인과 함께 있었고, 소대장은 애인과 교외로 데이트를 나가면서 그를 동행시켰다고 합니다.
교외에 나가서 함께 노래를 부르려나, 하며 따라갔으나 소대장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멀찍이 앉아서 기타 치며 분위기 잡는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속이 상했지만 꾹 참으며 노래를 불렀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자기들끼리만 식사를 하러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이 분은 장교 같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주번사관을 하는 날은 꼭 건빵이나 이면수라는 생선을 식용유에 튀겨 꾸역꾸역 먹으며, 글씨 잘 쓰는 행정병을 시켜 애인에게 편지를 대신 쓰게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방화수에 인분을 타서 먹으라고
결국 제가 부대 내의 최고참이 되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도 그 분이 주번사관을 한 날이었고 나는 다음해의 훈련계획을 작성하느라 밤을 새운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점호를 마치고 마지막 보고를 위한 차트 정리를 하고 있는데 급히 오라는 전달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내려갔더니 내무반 앞에 도톰한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화장실에 가기 귀찮아서 화단에다 실례를 한 것 같았습니다.
겨울 일기예보 때 자주 등장하는 향로봉이나 대암산 지역은 정말 추운데, 그 날도 얼마나 추웠던지 큰 것 작은 것 모두 도톰하게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것을 방화삽으로 긁어 방화수에 타더니 나더러 마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마시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시게 하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잘못되었다면 불침번을 혼을 내면 될 텐데 일하느라 밤을 새운 저에게 강요하는 것은 최고참인 제가 시범케이스로 마시면 전원이 말없이 마실 것이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걸 마시면 전 중대원이 마셔야 할 것이고 거부하면 구타를 당하겠지만 여기서 상황이 마무리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시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사실 방화수에는 부동액이 들어 있어서 마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날 저는 얼마나 구타를 당했던지 왼쪽 고막이 터졌고,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만년필이 두 동강이 날 정도로 원투 펀치를 가슴에 맞아 한동안 숨 쉬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 만년필은 입대할 적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준 것이라 애지중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군화에 채인 양쪽 촛대 뼈의 상처는 안으로 곪아 오랫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도 이 상처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이 흔적만 보면 그때의 생각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결국 소대장의 이런 행동은 얼마 후 사령부의 불시점검에 걸려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 동안 잠재되었던 많은 문제도 함께 노출되어 중대장까지 나서서 주의를 주었음에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자 중대장은 근무 평가를 하면서 '군 생활 부적격자'라는 의견을 적었습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은 중대장이 의견을 주면 저는 그것을 정서하고 다시 중대장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밀봉하여 인사참모부에 제출한 며칠 후 그 소대장은 어떻게 알았는지 저를 조용히 부르더니 그걸 바꿔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저의 권한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저는 제대를 했고 그와 동시에 나쁜 것은 모두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군 생활이 저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군 생활하는 분들께
이렇게 제대를 하고 벌써 25년 이상이 지났고 제 아들 또한 지금 병장으로 복무중입니다. 저는 제대를 하면서 10년 후쯤에는 모든 군대의 분위기가 질서 잡힌 가족처럼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훈련소의 인분사건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는 아직도 그런 중대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째는 훈련병 시절에도 인분사건 같은 그런 내용을 편지에 쓸 수가 있으니 그래도 군대가 조금은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셋째 요즘은 훈련병들도 이렇게 인간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왜 자대로 가면 같아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아들이 군 복무 중인 관계로 군대에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에 자주 접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군대 좋아졌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도 그 곳에 올라온 이야기들을 읽으면 제가 군 생활할 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장교 분들이나 부사관분들의 문제도 있었으나 대부분 사병들 간의 문제였습니다. 아직도 고참에 의한 얼차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장교나 부사관들의 문제라면 직업의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병들 간의 문제는 노력만 하면 형과 아우처럼 서로 도우며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왜 아직까지 그런 문제들이 남아 있을까요?
그것을 다시 해석하면 훈련병 시절에 느꼈던 어려움을 고참이 되면 다 잊어버린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런 것은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정해진 기간 동안만 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 다시 만나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내가 당한 만큼 해주겠다는 전통이 고쳐지지 않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사병들은 내 선임은 나보다 더했다는 생각을 버리고, 또 장교분들께서나 부사관님들께서도 요즘 입대하는 신병들은 정신상태가 틀렸다는 생각 또한 하지 마시고 나부터, 늦었지만 지금부터 함께 조금씩 바꿔 나가면 이런 악습은 금방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글을 쓴 것은 지금 군 생활을 하시는 분들을 매도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오히려 본업에 묵묵히 충실하시는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쓰게 되었습니다.
일부 외국회사의 우리나라 주재원들은 전쟁 수당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 우리나라의 전방은 생활여건도 나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임무에 충실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저는 편하게 지낸다며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