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8일)로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경제포럼(WEF)이 3일째를 맞았다. 이곳 다보스는 여전히 하얀 눈에 덮여 있다.
어제는 날씨가 맑아 포럼장 주변 곳곳에서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인구 1만3천명의 눈 덮인 소도시는 외양만 보면 영락없는 스키리조트일뿐이다. 한 한국인 참석자는 "이발관 달력 속의 그림 같은 눈덮인 마을들을 볼 수 있다니…"라며 경관을 부러워했다.
겉모습은 평화로운 스키리조트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영 딴판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3천여 참석자들의 진지하고 뜨겁고 때론 격렬한 토론이 3일째 계속되면서 영하 10도를 밑도는 차가운 날씨는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200여개에 달하는 각종 크고 작은 토론을 닷새만에 소화해야 하는 탓에 주대회장 안팎은 종종걸음으로 다음 토론장을 향해 걸어가는 참석자들로 늘 붐빈다.
미국이 필요없는 세계가 오고 있는가
200여개에 달하는 토론주제 중에는 미국에 관한 것도 있다.
어제 저녁 열린 한 소토론의 주제는 '미국의 브랜드들이 유럽에서 쇠퇴하고 있는가'였다. 또 영국 BBC는 오늘 주대회장에서 '미국의 국제 지도력 위기'를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 꼭 그런 주제가 아니어도 올해 다보스포럼은 현장분위기 자체로만 보면 미국의 리더십이 국제사회로부터 '왕따'당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다보스포럼에서 접한 '미국 왕따' 분위기는 이 포럼을 취재하기 위해비행기를 타고 취리히로 날아오던 때부터 이미 접한 것이었다. 1월25일자 <파이낸셜 타임즈>에는 이런 내용의 칼럼이 실렸다.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공백이 이토록 두드러진 적이 없다."
'미국이 필요 없는 세계'라는 이 칼럼의 필자는 미국 뉴아메리카재단의 마이켈 린드. 그는 이 칼럼에서 "아시아에서 APEC 대신 미국을 배제한 아세안 플러스 3 회담 중심의 경제협력이 논의되고, 유럽에서는 나토 대신 독자적 방위체제의 구축이 추진되는 등 세계는 미국 없이도 이제 잘 굴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린드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대외정책에 넌더리가 난 국제사회가 아예 미국을 고의적으로 배제한 채 독자적인 세계질서를 논의하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인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유일한 초강대국일지 모르지만 국제사회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일방주의로 치닫고, 게다가 재선성공으로 미국민의 지지까지 확보하자 세계는 고의든 우연이든 아예 미국을 배제한 신세계질서의 구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며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마이클 린드의 이런 경고와 우려는 다보스의 행사장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보스포럼 참석자는 북미와 유럽이 각각 35%로 같다. 그러나 포럼의 주도력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 포럼에 4년째 참석하고 있는 여현덕(연세대 교수) 다보스포럼 한국자문역대표는 "다보스포럼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유럽간의 기싸움이 치열했다"고 지적했지만, 올해는 유럽의 기가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시 대통령이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블레어 영국 수상이 개막식을 주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1월25일자에서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을 전후한 급박한 일정 탓에 미국 행정부의 주요인사들이 포럼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썼지만 그들이 설사 다보스에 왔다 해도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을 분위기다.
영향력으로만 보면 미국에서는 부시행정부 인사들이 아니더라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 회장, 제프리삭스 콜럼비아대 교수 등 각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그렇다면 일반 참석자 규모도 유럽에 맞먹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도 다수 참석했는데 왜 미국은 포럼장 곳곳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형국이 되었을까? 그것은 '부시가 만들어낸 미국'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혹은 미국인이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부시가 만들어낸 미국이 그러했다.
토니 블레어의 이례적 연설과 신문들의 보도 차이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은 그런 분위기를 잘 읽고 다보스에 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행한 26일의 개막식 연설은 이례적으로 미국을 향해 '당신 왕따 당하는 것 알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부시의 재선 취임연설을 언급하면서 "미국이 자신이 설정한 의제를 국제사회에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미국 스스로가 국제사회가 설정한 의제에 동참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미국이 테러리즘에 대한 공조를 주장하며 이라크전쟁에 동참하라고 요구할 것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원조, 지구온난화방지 등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하라는 것.
주대회장을 가득 메운 2천여명의 청중들은 블레어의 그 이례적 연설을 듣고 "톱뉴스 감이다"라고들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아침 다보스의 호텔로비에 배달된 <파이낸셜 타임즈>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뉴욕타임즈 발행)은 "블레어 '다른 나라 말좀 들어라' 미국에 요구" 등의 제목으로 1면 머리기사를 실었다.
토니 블레어의 개막연설이 이례적이라고 받아들인 것은 보수적인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개막연설 후 호텔로 가서 쉬고 있는 토니 블레어를 만났다. '진심'을 묻고 싶었을 것이다. 청바지 차림에 맥주를 마시고 있던 토니 블레어는 "때로 나는 미국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적) 반응에 충격을 받곤 한다"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토니 블레어간에 어떤 대화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다음 날인 27일자 유럽판의 머리기사는 "블레어, 미국의 독재와의 싸움을 옹호하다"였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는 "국제사회가 미국의 긍정적 변화를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는 블레어의 변호성 발언을 받아냈다.
하지만 다보스 호텔에서 아침에 이 신문을 받아보던 사람들의 반응은 "<월스트리트 저널>이 왜 이러지"였다. 그들은 그런 보도가 포럼 참석자 사이에 광범하게 퍼져있는 미국에 대한 불신을 낮추지는 못할 것으로 보는 듯 했다.
이라크 전쟁 비판한 클린턴에게는 큰 박수 보내
개막식날 일반 참석자 8백여명이 자유롭게 참여한 원탁회의에서도 미국에 대한 조롱 혹은 불신의 장면이 등장했다.
가장 시급한 의제 6개를 참석자들이 정하는 과정에서 지구온난화 문제가 3번째 중요의제로 채택됐다. 사회자는 "당면한 지구온난화문제의 해결에 있어 강대국이 다른 국가들과 긴밀한 협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참석자들의 의견을 소개하면서 "그 강대국이 누구인지는 여러분들의 추측에 맡긴다"고 농담을 던졌다.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에 조인하지 않고 버티는 미국에 대한 조롱임을 눈치 챈 참석자들은 회의장 곳곳에서 폭소를 터뜨렸다.
68개조로 나뉘어 진행된 원탁회의의 한 조는 10명으로 구성되었다. 45조의 경우 미국인이 4명이고 멕시코, 카타르, 한국 등 비미국인이 6명이었지만 3시간동안의 조별 토론 내내 미국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날 원탁회의를 통한 주요의제 설정과정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다른 14개 의제들과 함께 후보로 제안되었지만 24%의 지지만을 획득해 과반 이상의 지지를 받은 빈곤퇴치(1위, 64%), 균등한 세계화(2위, 54%), 지구온난화대책(3위, 51%) 등에 한참 못미친 10위에 머물러 6대 의제에 선정되지 못했다.
다보스포럼에 참석 중인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은 "나도 원탁회의에 참석했지만 빈곤퇴치 등이 6대 의제로 선정되고 미국의 리더십은 한참 뒤로 물러난 것은 주최측은 물론 미국에게도 당황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보스포럼에서 미국의 모든 면이, 모든 미국 지도자들이 환영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27일 열린 아프리카 지원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사장은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고, 옆 자리에 앉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청중의 큰 박수를 받았다.
특히 클린턴은 1시간동안의 토론에서 약 7차례의 크고 작은 박수를 받았다. 청중들은 클린턴이 "부시 대통령이 최근 8백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이라크 전비로 추가 요청했다"면서 "이 예산의 극히 일부만 있어도 미국의 아프리카 지원금액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다"고 부시행정부의 이라크전쟁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자 가장 큰 박수를 보냈다.
그러고 보면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세계인들은 미국이 아니라 '부시가 만들어낸 미국'을 '왕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 | 블로그와 기성 언론, 공존할 수 있을까? | | | |
| | ▲ 오연호 대표 등 패널들이 토론 운영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 27일 저녁 다보스의 한 호텔에서는 '블로그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제목의 주제별 소토론이 벌어졌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를 비롯, CNN 전 동경 특파원 레베카 맥키넌, 소프트뱅크 캐피탈의 에릭 히퍼 등이 패널로 참여한 토론에서 참석자들은 블로그가 매체 시장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열띤 논쟁을 벌였다.
레베카 맥키넌은 CNN 재직 시절 한 동료 기자가 뉴스제작현장의 뒷 얘기를 개인 블로그에 올리다 회사 홍보팀으로부터 제지를 받은 사실을 공개하며 기존 매체가 통제불가능한 블로그의 등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연호 대표는 기성 언론인과 블로거들이 반드시 경쟁과 배척관계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오 대표는 아마추어 시민기자와 전문기자들이 경쟁하면서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오마이뉴스의 시스템을 예로 들며 인터넷 시대 뉴스 생산자와 소비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프랑스에서 인기 블로그 서비스를 운영 중인 '식스 어파트'의 로이 르 뮤어 대표는 개인 블로그에 광고게재를 해 큰 수익을 올리고 있는 블로거를 예로 들며 블로그가 기존 미디어의 수익모델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블로그가 개인에게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제공하는 긍정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면서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유포나 거짓정보의 제공으로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이럴 경우 블로거들 역시 언론과 마찬가지로 명예훼손소송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