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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열린우리당은 의원총회를 통해 정세균 의원을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하였다. 그동안 온건하면서도 합리적인 개혁노선을 보여온 정세균 의원의 원내대표 선출은 앞으로 열린우리당의 실용주의 노선 추진에 적지 않은 힘을 실어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 원대대표는 24일 정견발표 때 고어지사(枯魚之肆 : 먼 곳의 물로는 눈앞의 갈증을 풀지 못한다)라는 표현을 쓰며 민생회복에 역점을 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우리사회가 직면한 절실하고 실제적인 과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리겠다는 결심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집권여당으로서 개혁의 추진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겪고 있는 생활, 경제에서의 어려움을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경제생활의 질적 저하와 그것이 가져오는 사회적·인간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높은 실업률, 고용 불안정, 대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자,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파산에 따른 가정 붕괴, 신용불량자 확대, 경제난으로 인한 생계형 범조의 급증 등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우리의 삶의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평등의 원리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평등을 창출하는 자본주의와 항상적인 긴장관계에 있다. 양자간의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의 건설적인 타협을 통해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따라서 많은 국민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조건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이 문제에 대한 정책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기반은 점차 약해질 것이다. 또한 대의 민주주의에서 정당들이 이런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외면할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가 될 것이다.
사회의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부정책의 의제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치적 이슈 내지 정치적 사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 말해 어떤 문제가 한 사회의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정치의 장(場)에서 논의되지 않는다면 정책적 결과물로 현실화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발전하지 못하고 외면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할 수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바크라크와 바라츠(Bachrach & Baratz)는 다원주의(pluralism)의 권력개념을 비판하면서 ‘비결정’(non-decision)의 개념을 통해 중대한 사회경제적 갈등이나 이익들이 이슈화되지 못하게 하는 힘 또는 영향력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샤츠슈나이더(E. E. Schattchneider)도 한 사회의 중요하고도 지배적인 사회 갈등·이익을 배제하고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와 균열만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행태를 ‘갈등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conflict)로 개념화하였다.
‘비결정’과 ‘갈등의 사유화’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 정치권은 높은 실업률, 고용 불안정, 대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자,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파산에 따른 가정 붕괴, 신용불량자 확대 등의 우리사회의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논의와 정책개발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자산(資産) 확대를 위한 정치경쟁의 규칙 제도화의 영역 그리고 과거사 진상규명·지역주의 극복·용공 전력조사 등의 이데올로기적·감정적 이슈영역 등에 몰두해왔다. 지난해 12월 이철우 의원의 간첩논란,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여야의 첨예한 대치 등 정치권은 국민들을 감정적·이데올로기적 동원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요한 민생관련 법안의 심의나 의결 그리고 경제회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찾을 수 없었다. 시급하게 다루어야 할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정치적 이슈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버린 것이다. 작년 한해 정치권은 삶의 조건에 대한 문제들을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온 한국정치의 현실인 것이다. 정치가 현실생활에 기초한 사회경제적 이슈들 직시하고 정치의 영역에서 다루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정치권은 이를 방치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이 과정에서 특정 비정치경제적 이슈들이 과도하게 정치화되고, 결과적으로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쟁투의 장이 되면서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탈정치화(脫政治化)되었다.
결국 여야 간 정치적 갈등의 격렬함은 실제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이슈가 ‘비결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실제 이슈에서는 극히 좁은 갈등의 범위에 한정되어 있는 이른바 ‘협애한 정치적 대표체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200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새 희망과 기대로 한해를 시작한다. 새해의 시작과 함께 새롭게 선출된 정세균 원내대표 체제의 출범에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민들은 그동안 반복된 기대와 실망으로 새로 출범하는 열린우리당의 새지도부에 대한 우려를 숨기지 않는다.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새 지도부가 과연 국민들의 어려움을 덜고 민생과 경제회복에 얼마나 노력할지에 대해서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실망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올해는 정치권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정쟁을 지양하고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는 현장의 정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로 재구조화된 시장경제 경쟁에서 소외되고, 생산과 소비의 영역에서 주변화 되고 있다. 그 결과 사회 제 분야에서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기반이 점차 침식하고 있다. 경제 또는 시장영역의 약자이면서도 정치적으로 평등한 보통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그 기반과 지지가 약해지면서 위기의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정치권은 인식해야 한다.
새롭게 출범한 정세균 원내대표 체제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의 새로운 역할과 노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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