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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술시범이 끝나고 화성행궁(행궁: 왕이 지방에 나들이 할 때 임시로 머물던 곳으로, 고려시대에는 이궁(離宮)이라고도 부름)으로 들어갔다. 참여자가 많은 관계로 3팀으로 나누고 각각 경기지역의 현지교사들이 행궁안내를 해주었다.
ⓒ 최장문
방학 때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주관으로 3박 4일간 자율자주연수를 실시한다. 연수기간 동안 지역답사, 초청강연 및 세미나, 수업사례발표, 수업성과물 전시 및 공유, 역사교사의 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번에는 1월 21일부터 24일까지 경기도(수원)에서 '정조의 꿈과 좌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40여명의 역사교사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 첫날 오후 2시가 되자 전국의 역사교사들이 집결지인 화성행궁 앞에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24반 무술시범을 보면서 연수는 시작되었다.
ⓒ 최장문
한신대 숙소에서는 3일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인, 낯익은 혹은 처음 보는 역사교사들의 만남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세 팀으로 융릉과 건릉, 수원화성을 교대로 답사하였다.

둘째 날 창현고등학교 이명섭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화성 한 바퀴를 돌았다. 5년 남짓 답사반을 운영해오고 있으며, 남달리 수원화성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 화성 구석구석에 묻어 있는 흔적까지도 숨겨진 의미를 설명해주셨다.

▲ 팔달문 입구에 설치된 화성안내도. 화성이 도시 한복판을 품고 있으며, 그 중심에 수원천이 흐르고 있다. 하천 왼쪽 네모형태의 집은 행궁이며, 행궁 뒷편에는 주산인 팔달산이 자리잡고 있다. 아래쪽에 있는 문은 팔달문(남문)으로 천안방향과 일치하며, 위쪽의 문은 장안문(북문)으로 한양방향이다.
ⓒ 최장문
우리 팀은 이른 아침에 팔달문에서 성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왔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화성은 길이가 6km 정도의 네모에 가까운 원 모양으로 1만1000여명이 머물 수 있는 규모이다.

300억 가량의 재정으로 정조 18년(1794) 1월에 시작하여 정조 20년 10월에 완공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더 발달한 과학기술과 더 많은 재정을 가지고서도 축조가 불가능함을 감안하면 당시 얼마만큼 치밀하면서도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화성은 광복이후 2번 보수공사를 하였다고한다. 네모반듯한 최근의 석조물보다는 옛것이 자연스럽고 정겹게 느껴진다.
ⓒ 최장문

▲ 화양루 - 서포루 - 서암문 - 화서장대를 지나자 화서문이 보인다. 그 뒤에 우뚝 솟은 것은 서북공심돈.
ⓒ 최장문

화서장대를 정점으로 해서 평지에 내려오니 서북공심돈이다. 돈(墩)은 성곽 주위와 비상시에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와 같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뚝 솟아있으며, 밑에서 바라보면 가파른 상승감과 위압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 위용이 대단하여 수원시에서는 수원의 상징마크로도 사용한다. 팔달문 옆의 상설시장 통로를 지나다 보면 또 다른 서북공심돈을 만날 수 있다.

▲ 서북공심돈과 또하나의 서북공심돈. 오른쪽의 대리석 서북공심돈은 최근에 시장통에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뒤편에 희미하게 팔달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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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문을 지나서 갈비탕으로 점심을 먹고 화홍문(북수문)에 이르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원축제를 화홍축제라 부를 만큼 경치가 좋은 곳이라 하였다. 1925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갔는데, 남은 기초석 위에 다시 올린 것이다. 화홍문을 지나는 물들이 수문을 통과하여 돌에 떨어지고, 다시 막돌 사이로 흐르는 소리가 정겨웠다.

▲ “화홍문 아래의 낙수에 의해 물보라가 생기는데 그 물보라 속에 햇빛이 비치면 그 안에 무지개가 나타난다. 그래서 이름도 빛날화(華)에 무지개홍(虹)을 써서 화홍문이라 한다. 여름 오후 3시경에 오면 버드나무와 어우러져 그 멋이 절정이다” 라며 이명섭 선생님이 신이 나서 설명해 주었다.
ⓒ 최장문
물보라 속에 반사되어 나타나는 무지개를 생각하며 걷다보니 이번에는 연못과 버드나무가 있고 그 위에 성곽이 있고, 다시 그 위에 정자가 있다. 조선시대 가장 아름다운 누각 중의 하나인 방화수류정이라 한다. 바람이 없는 잔잔한 밤에 보름달이 뜨고, 그 보름달이 용지(연못)에 비치면 그 안에 정자(방화수류정)가 담겨 있다고 한다. 상상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이명섭 선생님은 자랑하였다.

▲ 방화수류정과 용지대월. 연못은 본래 성벽방어 기능인 해자역할이었다. 그 역할을 살리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니 가히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 할 수 있겠다.
ⓒ 최장문
연무대를 지나니 활쏘기 체험장이 있었다. 50m, 250m 과녁이 있는데 활을 잡고 느껴보는 250m는 아주 먼 거리였다. 초보자는 50m 과녁에서 체험을 하는데 50m까지 나가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었다. 생각처럼 쉽게 활시위가 당겨지지 않았다.

▲ 답사에 참여한 선생님들이 활쏘기 체험을 하고 있다. 들어갈 땐 전쟁에 임하는 장군들처럼 기세당당하지만 그들이 쏜 화살은 대부분 50m도 미치지 못하였다.
ⓒ 최장문
오후 4시가 조금 못되어 창룡문에 도달했다. 화성에는 4대 성문이 있는데 보존상태와 관련하여 "남문(팔달문)은 남아 있고, 북문(장안문)은 부서지고, 서문(화서문)은 서 있고, 동문(창룡문)은 도망갔다"라는 말이 있다. 동문인 창룡문은 위만 도망가고 석축이 남아 있어 부서진 윗부분만 보수한 것이다.

그런데 석축의 무사석(武砂石)에는 해당 시설물을 감독한 감독 이하 석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자의 직역과 이름을 기록해놓고 있었다. 수원화성이 시대의 격동기 속에서 어떻게 200년간이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대의 책임회피 행정자와 부실공사자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소중한 돌들이었다.

▲ 공사의 책임과 더불어 그 공적을 후세에 남긴 창룡문의 석축. 세 돌이 한 쌍으로 맞춰져 있다.
ⓒ 최장문
이명섭 선생님과 함께한 화성 한바퀴!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화서장대를 거쳐 서북공심돈, 장안문, 화홍문(북수문), 방화수류정, 창룡문! 어느 것 하나 자연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실용성을 바탕으로 자기의 기능을 살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거대한 성이 수원의 도시 한복판에서 수원시민들과 함께 살아 숨쉬며 휴식과 추억의 장소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 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대전으로 홈쳐가고 싶을 정도이다.

수원시에서는 1조원을 들여 2020년까지 복원을 한다고 한다. 복원의 이름으로 현대문명의 흔적들을 너무 많이 집어넣는 현대판 복원이 아닌 본래 화성에 맞는 자연과 어울리는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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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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