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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산 전경
ⓒ 정윤섭
여자의 자궁과도 같은 강진만을 따라 오르다 만덕산 기슭에 오면 겨울 바람도 잠시 쉬어 갈 듯 잔잔하다. 다산초당은 그리 높지 않은 야트막한 만덕산 기슭에 겨울 속을 초탈한 듯 안온한 산의 품안에서 고요하다.

찾아오는 이 없었을 이 남녘 끝 바닷가에서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의 시간을 보냈다니. 한 인간이 세상과 격리된 채 18년을 산다는 것은 분명 참기 어려운 고통일 수밖에 없다.

유배는 강제로 세상에서 격리되는 것이다. 정변의 회오리에서 떠나온 유배길, 유배는 가혹한 형벌 중 하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과의 격리는 때론 하나의 일에 전념하게 하여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완성하게도 한다. 유배생활이 한 인간에게는 가혹한 시간의 별리였겠지만 그를 통해 낳은 학문적 업적은 때로 세상을 변혁하게 하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당시 누구도 찾아오기 힘들었을 이 변방의 해안에 자리잡은 유배지에 지금은 멀리서 찾아오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일 새 없다. 다산의 유배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군중속에서도 혼자라는 어쩔 수 없는 고독감을 위로받기 위해 떠나온 것은 아닐지.

다산 정약용(1762~1836),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를 떠올리고 다시 한번 그가 머문 긴 유배길의 여정을 찾아보고 싶은 것은 고단한 현재의 삶에서 다산이 남겼던 <목민심서>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18년 동안 이 궁벽한 바닷가에서 사는 동안 다산은 수많은 저서를 통해 실학이라는 학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오늘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게 하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자세를 저술한 <목민심서>다.

백성들이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게 사는 것, 이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군자(임금)가 백성을 다스리는 첫 덕목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다산이 말한 한 현명한 목민관이 그리워지는 것은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다산의 실학사상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상이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당으로 가는 길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입구에는 귤동(橘洞) 마을이 있다. 다산초당은 귤동 마을 바로 뒷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지금도 물이 흘러 넘치는 샘이 있다. 생명의 원천수 같은 샘이 마을 앞 동구에 있다는 것은 어쩐지 정겨움이 앞선다.

감나무와 유자나무…. 그런 시골집 안마당의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다. 세상 따라 이 마을도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것들이 오래 전 다산이 머문 한적한 시골마을의 고적함을 느끼게 해준다.

▲ 다산초당 오르는 길
ⓒ 정윤섭
초당으로 오르는 대나무 숲 옆길을 걸으면 소나무와 참나무들의 뿌리와 뿌리들이 얽혀 있는 길이 나타난다. 길옆 소나무 숲에는 인공적으로 심어진 차나무들이 푸르다. 본래 이곳은 야생차가 많이 자라는 곳이었다고 하는데 다산이라는 호도 이곳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 초당으로 오르는 길의 윤종진 묘 옆 문인석
ⓒ 정윤섭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길옆에 윤종진(尹鍾軫)의 무덤이 보인다. 다산의 제자 중에는 해남윤씨들이 많아 해남윤씨들의 위세가 느껴진다. 윤종의 묘비에는 세월의 각질을 보여주는 이끼가 푸르다. 더 정겨운 것은 묘를 지키는 문인석이다. 그 아기자기한 표현이 딱딱한 문인석의 모습의 아니다. 마치 어린 동자 같은 모습이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 다산초당
ⓒ 정윤섭
드러난 돌틈과 나무의 얽힘, 그리고 돌계단을 지나는 사이 초당의 모습이 나타난다. 아니 지금은 초당이 아니고 번듯한 기와로 다시 지은 집이다. 다산초당 옆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고 초당 마루에 앉아 다산이 저술한 <목민심서>를 되새겨 본다.

백성을 잘 다스리고 편안하게 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이제는 지방분권을 나라의 기틀로 다지려 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쇠해 가는 조선을 실학이라는 학문으로 ‘혁신’하고자 했던 정약용의 학문정신은 지금 이 순간 더 뜨겁게 백성의 안위를 살피고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하는가에 대한 물음 앞에 서게 한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 온 후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이나 제자인 이학래 집에서 8년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이곳 귤동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곳은 본래 제자 윤단(1744~1821)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1808년 봄에 다산을 이곳 초당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하였는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제자 중에는 해남윤씨가 많았다고 한다. 다신계에는 다산초당에서 다산을 따르던 18명의 제자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10명이 해남윤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래 해남윤씨의 뿌리가 이곳 강진도암 일대이자 이웃군인 해남의 녹우당이 다산의 외가(어머니가 해남윤씨)라는 것도 무시못할 것이다.

해남 녹우당에 해남윤씨가의 종통이 아직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보면 흔들리지 않은 뿌리의 힘을 느낀다.

‘목민심서’의 저술처 동암

다산초당 옆에는 나무통을 따라 졸졸 흐르던 물이 떨어져 작은 연못을 이룬다. 연못을 지나면 천일각이 있는 정자로 넘어가기 전에 ‘동암(東庵)’이 자리잡고 있다. 다산이 초막을 짓고 거쳐하였던 곳으로 <목민심서>, <흠흠심서> 등 3백여권의 책을 저술한 곳이다.

▲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한 송풍암
ⓒ 정윤섭
이 동암을 일명 ‘송풍암(松風庵)’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송풍암은 주변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고 하여 ‘송풍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고적한 산중에서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다산이 밤을 세워 책을 저술했을 것을 생각하면 고독한 은자의 삶과도 같았을 다산의 생활이 어릿하게 그려진다.

<다산연보>에는 다산이 제자들의 도움으로 많은 책을 저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公은 20년 가까이 고독하고 우울한 심경으로 지낼 때 일찍이 다산초당에서 연구저술에 마음을 기울여 여름의 무더위에도 쉬지 않고 겨울밤엔 닭의 울음을 듣곤 하였다. 그 제자들 가운데 경전을 열람하고 역사서를 탐색하는 자가 두어 사람, 부르는 대로 받아쓰는데 붓 달리기를 나는 듯 하는 자가 두세 사람, 손을 바꾸어 가며 수정한 원고를 정서하는 자가 두세 사람, 옆에서 거들어 줄을 치거나 교정·대조하거나 책을 매는 작업을 하는 자가 서너 사람이었다. 무릇 어떤 저술을 시작할 때는 먼저 거기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되 서로서로 대비하고 이것저것 훑고 찾아 마치 빗질하듯 정밀을 기했다.

솔바람이 불어오는 송풍암에서 무지렁이 백성들을 생각하며 <목민심서>를 썼을 당시 모습이 다가온다. 지금은 초가집이 아니고 어엿한 기와집으로 되어 있지만 한밤의 솔바람 소리가 무던히도 다산의 마음을 애끓게 하였을 것이다.

다산의 <목민심서>는 지금 이 시대 지방관들이 한번쯤 읽어 보아야할 필독서가 아닐까. 다산은 지방관으로 있던 때의 체험과 강진으로 귀양가 있을 때에 보고 들은 여러 가지 사실에 기초하여, 지방 관헌의 윤리적 각성을 도모하고 농민경제의 정상화를 위하여 <목민심서>를 지었다고 한다.

다산의 <목민심서>에서는 시대만 다를 뿐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의 임무가 무엇인지가 잘 나와있다. 이들 목민관들이 지금 다산의 <목민심서>를 읽어본다면 어떨까.

지금의 개념으로 해석해 보면 수령(守令)은 조선시대 때 고을을 다스리는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등 관원을 두루 일컫던 말로 지금의 자치단체장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전(衙前)은 조선시대 때 지방관아에 속해 있던 하급 관원으로, 오늘날로 치면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민원부서 공무원들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이 <목민심서>에서 말했던 것 중에 가장 먼저는 덕망, 위신, 총명이었다. 다산은 목민관이 교활한 아전(衙前)들의 부정을 방지하고 백성들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중대한 임무를 지니고 있으므로 반드시 덕망, 위신, 총명을 갖춘 적임자를 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산은 수령이 생활신조로 받들어야할 덕목으로 청렴, 절검(節儉), 명예와 재리(財利)를 탐내지 말 것을 강조했다. 본연의 의무로 다산은 수령의 마음가짐으로 청심(淸心)을 들고 있다. 청심, 즉 맑은 마음이 어진 정치와 덕행의 근원이 되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다산시대와 오늘의 사정은 어떤가? 목민심서가 쓰여진 당시는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 수탈이 극심했던 시기이다. 오늘의 사정은 다른 것일까. 뇌물과 청탁, 이권개입 등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 오랜 관료사회의 전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판 매관이라 할 수 있는 유권자들에게 돈을 돌리거나 향응을 제공하는 금권선거는 다산시대의 매관(買官)과 같은 것은 아닌지. 이렇게 당선된 사람들이 청렴, 절약을 실천할 수 있을까. 과거 매관한 수령들처럼 본전 이상의 이득을 얻기 위해 유권자들을 위한 행정을 펴기보다는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지 않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절용의 정신이 요구되는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자체가 호화 청사 건립과 관사를 짓고 무리한 사업을 벌리는 것을 보면 다산이 지적한 절용의 정신과는 상반되는 이러한 일들은 오늘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다산의 실학사상을 꿰뚫고 있는 ‘경세제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뜻을 지녔다는 이 뜻은 오래 전에는 나라와 백성들의 생활 수단을 이끌어 간다는 의미를 지녔지만, 지금은 ‘인간생활의 유지나 발전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 이용하는 과정의 모든 활동'을 의미하는 ‘경제(經濟)'라는 용어의 본말을 지니고 있어, 그 개념이 지금의 산업 구조와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오늘의 삶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 놀랍다.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정치를 의미하며 경국 또는 제민과 거의 같은 말로 경세제민을 줄여서 경제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경제가 과연 어느 시대에나 으뜸으로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암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올라서면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천일각’이 나온다. 다산이 멀리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였다는 정자다.

오직 형만을 위한 그리움이었을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임금에 대한, 그리고 국운을 잃어 가는 한 왕조의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이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한 인간의 세상에 대한 열망이 베어 있었을 것이다. 멀리 강진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그리움과 또다시 먼바다로 띄워 보내는 애틋함을 실어 나른다.

덧붙이는 글 | 어려윤 경제현실과 지반분권화의 시대에 목민관의 자세를 생각하며 다산의 유배지를 찾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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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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