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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태어난 이들이라면 어린이대공원에서 찍은 사진 한 장 정도는 앨범에 꽂혀 있을 정도로, 내 유년 시절에도 어린이대공원은 필수코스였다.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 손잡고 가는 단골 장소였고,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딱히 놀 곳이 없던 때라 대공원 놀이동산에서 바이킹을 타며 동창회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소풍을 갔던 기억이 난다.
부산진구 초읍동에 자리잡은 그 어린이대공원이 올해부터 무료 개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달 30일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사촌동생과 그곳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어린이대공원은 예전보다 많이 가꾸어진 모습이었다. 올해 들어 날씨가 가장 추운 날이었지만 일요일을 이용해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이제 막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부터 동생의 질문이 터져 나온다.
"행님아, 안보의식이 뭔데?"
입구 쪽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으로 오르는 계단 옆, 눈에 띄게 큰 모양새를 하고 있는 간첩신고 광고판이 버티고 있다. 상담실 안내표지판 보다 훨씬 컸다. 질문은 또 이어진다.
"어린이대공원에 간첩이 그렇게 많나?"
크기로 보나 글귀로 보나 아이는 보지도 못한 그 '간첩' 때문에 저걸 저렇게나 크게 만들어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는 먼저 가까운 어린이회관으로 향했다. 줄을 서서 신기한 눈빛으로 정해진 코스를 타며 견학하던 곳. 내 기억으로 그곳은 첨단 과학문명을 맛볼 수 있는 신비한 공간이었다. 지금도 그 과학원리를 알려주는 낡은 기구들은 그대로였고 인체탐험 같은 새로운 내용들이 추가되었다. 통일교육관도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어라? 층 중앙에 천장을 무궁화 장식으로 만든, 이 회관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듯한 뭔가가 눈에 확 띄는데.
중앙에 고 육영수 여사의 흉상과 함께 왼쪽에는 육영수 여사가 쓴 글이, 오른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이 보였다. 추모의 분위기가 너무 강렬해 동생의 질문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꾸며놓을 정도라면 뭔가 대단한 인물이었을 거라는 것. 내가 잘 모르는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갈 수 있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문제였다. 평가가 엇갈려 많은 논란이 되는 인물에게 이렇게 좋은 인상만 심어주는 공간을 회관에 마련해두었으니 말이다.
유신독재부터 이야기할까. 경제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자행한 인권탄압 등등. 오면서 본 간첩신고 안내판을 곁들여서. 그리고 암살되기까지. 한편으로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는 점을 추가하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너무 좋지 않은 면만 얘기하면 동생이 이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모든 시설물을 부정하게 되는 건 아닐까.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전전긍긍. 흉상에게 버럭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결국 집에 가서 설명해주겠다고 대답을 미뤘다. 잠깐, 여기서 이걸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나? 보이지 않는다. 함께 견학 오는 선생님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궁금해진다.
오른쪽 공간에는 박근혜 의원이 예전에 기증했다는 기증품 전시관이 있다. 박제표범에서부터 소형병풍까지 주로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것들인데 당시에는 소장가치가 있음직한 물건들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굳이 이런 것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층 전체를 박정희 일가 특별전시장으로 기획한 인상을 받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어린이회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손녀를 업고 회관으로 힘겹게 오르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어린이대공원 곳곳에서 만나는 '간첩신고'를 보며 유신독재시절 느꼈던 충격과 공포를 떠올릴테다. 그 공포는 어린이회관에 전시된 박정희를 보며 극에 달할 것이다.
당시 간첩으로 몰려 죽을까 두려움에 벌벌 떨며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시끄럽게 고백해야했던 정서를 자신도 모르게 궁금증 많은 손녀에게 전달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손녀는 그 정서를 고스란히 받아 안을테지. '레드콤플렉스'는 그렇게 어린이대공원에서도 이어져 왔나보다. 집에 가면 동생에게 해주어야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