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카드는 그래도 로컬 기업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반미 물결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은 편이죠. 한국의 소비자들은 우리가 쌀밥만큼이나 친숙하다고 말합니다."
- 존 엘킨스, 비자 인터내셔널 부사장
"반미정서가 극심한 중동에서 코카콜라는 매출이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 펩시콜라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승승장구 하고 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 존 A. 퀠치,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 외교로 미국이 유례없는 '왕따'를 당한 올 해 다보스 포럼에서 참석자들 사이에 떠오른 또 하나의 화두는, 그렇다면 반미감정이 아메리칸 브랜드의 장래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국제PR대행사인 에델만의 리차드 에델만 사장은 "아메리칸 브랜드가 어떻게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냉기류를 만났는가?"라는 제목의 포럼에서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심화된 반미감정으로 인해 미국과 유럽간의 불신의 골이 더욱 깊어진 반면에 중국, 일본, 남미 등지에서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델만이 세계의 여론주도층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코카콜라, 맥도널드, 버거킹, 말보로 같은 미국산 글로벌 브랜드에 대해 미국의 응답자들이 69%의 신뢰도를 보인 반면 유럽과 캐나다의 응답자는 각각 45%와 46%에 그치는 저조한 지지율을 보였다.
반면 중국, 일본, 브라질의 응답자들은 이들 미국산 브랜드에 대해 미국의 조사대상자들과 별 차이가 없는 비슷한 신뢰도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이들 국가에서는 반미감정과 상관 없이 여전히 미국적 가치와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차이를 다보스 포럼의 참석자들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미국에 대한 반감이 미국 브랜드 일반에 대한 호감도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는 가설이 옳다면 왜 코카콜라와 맥도널드 햄버거 불매운동에는 동참하는 사람들이 같은 미국 제품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는 컴퓨터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며 한국의 소비자들은 왜 비자카드에 변함 없는 지지를 보내는 것일까?
영국 런던대학의 A.C. 그레일링 교수는 "반미물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브랜드는 미국이 지향하는 가치와 생활방식을 파는 브랜드"들이라고 지적한다. 코카콜라, 맥도널드, 말보로, 디즈니 같은 제품을 구매하는 세계의 소비자들은 단순히 제품 자체가 아니라 브랜드에 진하게 배어있는 자유, 진보, 혁신, 이상, 프런티어 정신 등 미국적 가치에 대한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것이라는 의미.
반미감정에 따른 미국 브랜드들의 어려움은 유럽지역에 한정
에델만의 여론조사 역시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에델만 사장은 반미물결의 직격탄을 맞은 쪽은 "브랜드와 신뢰를 먹고 사는 기업들"이라며 반면에 "IT와 첨단기술 브랜드는 미국산이라기보다 글로벌 브랜드로 인식되는 탓에 타격을 입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HP(*HP는 다보스 포럼의 주요 후원기업이었다) 등의 미국산 하이테크 브랜드가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왜 반미감정을 연상시키지 않는 지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존 A. 퀠치 교수는 맥도널드와 코카콜라 등이 급증하는 반미감정의 주 공격대상으로 지목되면서 이들 기업이 매출에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는 반미감정의 비등에 따른 미국 브랜드들의 어려움은 유럽지역에 한정되었고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코카콜라가 유럽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가짜 생수나 불량 콜라 파동 등 경영 미숙에서 비롯된 것이지 반미감정 탓은 아니라는 것. 미국산 브랜드가 반미감정으로 유럽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스타벅스의 파리 매장 오픈이 이 회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 퀠치 교수의 질문이다.
국가 간의 감정대립이 격화되면서 해당국가의 생산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비화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유럽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데 앞장 선 프랑스에 대해 미국의 소비자들이 프랑스산 포도주를 보이콧하고 엉뚱하게도 패스트푸드 점의 프렌치프라이 안 먹기 운동으로 번졌던 것 등이 바로 그것.
스위스의 만평가 이고르 크라바릭은 아메리칸 브랜드에 대한 반감이 꼭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 때문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좌파인 한 친구의 예를 들며 "미국이 싫다며 운영하는 술집에서 코카콜라를 치워버린 그 친구가 러시아가 싫다고 보드카에 화살을 돌리거나 한 적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산 브랜드에 대한 반감의 한편에는 미국에 대한 질시의 감정이 숨어있고 그것은 미국인의 잘난 체 하는 습성에 대한 반감 때문일 수 있다"며 정곡을 찔렀다. 유럽인 한 켠에 숨어있는 미국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이 미국산 브랜드에 대한 반감이 만연한 이유 중 하나라는 해석이다.
비록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같은 대표적인 미국산 소비재 브랜드들이 반미 감정으로 당장 매출에 큰 타격을 받거나 하지는 않더라도 기업 전략 측면에서는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반미 감정을 항상 의식한 상태에서 경영이 이루어진다면 결국 이들 기업의 활동반경이 위축될 수 있다는 것.
퀠치교수는 코카콜라의 더글라스 대프트 사장이 2000년도에 'Think local, Act local'이라는 파격적인 경영방침을 제시하고 대대적인 현지채용을 하는 등의 노력을 꾸준히 해 온 결과 코카콜라가 그나마 유럽에서 반미감정을 그럭저럭 헤쳐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랜드 중심의 신경제는 양날의 칼
코카콜라나 말보로, 디즈니처럼 미국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브랜드들은 호의적인 국가 이미지라는 배경을 앞세워 지난 20세기를 통틀어 세계시장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들의 제품력에 국가이미지라는 프리미엄이 배어있어 진출 초기에 나라 덕을 톡톡히 본 셈.
하지만 반대로 국가이미지가 개별기업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까 오히려 껄끄럽게 여기는 기업도 있다. 바로 한국의 삼성.
지난 2002년 10월 당시 삼성전자의 장일형 전무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이 한국 기업이라는 점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는다" 면서도 "'삼성은 한국의 기업'이라고 자신을 부각시킨 적은 없으며 일본의 소니처럼 세계인들로부터 선호받는 다국적 이미지의 브랜드를 만들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해석에 따라서는 한국의 국가이미지가 삼성의 글로벌 브랜드 전략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발언.
산업의 무게중심이 제조업에서 점차 서비스와 콘텐츠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국가이미지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최근 한류스타의 인기상승으로 아시아권에서 한국의 국가이미지가 크게 개선되고 덩달아 한국산 제품의 판매증진으로 이어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
하지만 브랜드 중심의 신경제는 무형자산 위주로 가치가 창출되는 만큼 어느 브랜드든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어느 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수도 있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앞세워 흥했다가 반미감정으로 곤경에 처한 미국산 브랜드들의 사례는 브랜드와 이미지 중심의 신경제가 얼마든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