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언니, 또 그 사람 생각하구 있구나?”

손가장 내의 정고헌(庭睾軒)이었다. 그녀는 정고헌을 감싸고 도는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 위로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비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반 표사 옷을 입고 허둥대던 그의 모습…. 풍운삼절과의 혈투…. 그리고 동굴 속에서 죽음과 싸우던 모습.

이곳에 와서야 그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보였었다. 주위 사람들 때문에 말을 나누기도 어려웠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사람. 은밀한 눈길 하나로도 마음이 저리고 안타깝게 만들던 사람. 그저 돌아 보는 눈길에 안기고 싶었던 사람. 겨우 이삼일 동안 같이 머문 곳이었지만 그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아마 지금 자신을 부르는 서가화에게 처음으로 그 사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보인 곳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너는… 이제 그만 놀릴 때도 되었잖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송하령은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이제 마음이 들키면 어쩌랴. 어차피 이런 모습을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늘을 보다가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고 무심히 지나가는 바람 결에도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도 싶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서가화는 슬그머니 송하령의 옆자리에 몸을 걸친다.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송하령은 목말라하고 있었다. 분명 아닌 줄 알면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들린다치면 놀란 듯 고개를 돌리고 가끔 초점없는 시선을 먼곳에 두고는 주위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문득 자신에게도 그 사내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그래서 송하령을 이해하려 했다. 사랑이란 열병에 빠져버린 그녀에게 있어 그래도 서가화는 큰 위안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분은 괜찮겠지?”

여자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더구나 사랑에 빠진 여자는 더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사랑을 시작한 여자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과 마음을 마구 자신의 것으로 채색해 버리기 때문이다. 헤어져 있어도 송하령은 스스로 사랑을 키우고 있었다.

“언니가 괜찮은 것과 마찬가지겠지. 갈대인께서 아무 말씀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무 일 없을거야. 더구나 구양대협하고 같이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서가화는 대답을 하면서 공연히 심술이 일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갈유가 말해 주었을 것이다. 별탈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몇 번이나 이렇게 물어 보는지 모른다. 그녀는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을 이었다.

“모르지. 그 일행에 산산언니가 있단 말이야. 나야 어쩌다 강남삼미에 끼어들었지만 산산언니는 다르거든. 예쁘지. 머리 비상하지. 무공이 뒤지나 집안이 안좋은가…. 무엇보다도 그 언니는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거든.”

“무슨 말을 하는거야?”
“뭐 그렇 수 있다는거지. 산산언니가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앞 뒤 안가릴거거든.”

분명 또 놀리는 소리인지는 안다. 그 사람은 절대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줄 사람이 아니다. 그녀만의 바람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 오르는 불안함은 어찌할 수가 없다. 여자란 이렇다.

"그만해…. 얘는… 요사이 네 취미가 한 가지 더 늘었구나."
"언니가 그러는 것을 보면 괜히 심술이 나거든…. 호호"

서가화는 솔직하고 직선적이다. 송하령은 상념을 떨쳐 버리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물었다.

“갈대인께서는 말씀이 끝나셨니?”
“아니…. 아직. 헌데 우리가 소림사를 떠난지 사흘 밖에 안됐는데 무슨 이유로 광지선사(廣知禪師)께서 쫒아 오신걸까?”

모를 일이었다. 그녀들은 갈유와 함께 소림에서 보름 정도를 머물렀다. 그녀들에 대한 예우는 너무 과분할 정도여서 많은 것을 접할 수 있었다. 외인들을 들이지 않는다는 장경각(藏經閣)까지 들어가 선대 고승들이 남긴 불학(佛學)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전연부의 부탁에 따라 낙양에 잠시 들렀다가 정주의 손가장에 들렀던 것이다.

“낸들 알겠니? 더구나 선사를 따라 오신 분들도 범상치 않던데….”

장경각(藏經閣)을 맡고 있는 광지선사를 수행하고 온 소림제자 두 명은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혜(慧)자 돌림의 인물들로 보이나 그녀들이 보아왔던 혜각대사(慧覺大師)나 혜원대사(慧元大師)와 같은 부드러움이나 자애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율(戒律)에 엄격함이 배어 있는 수도승 같은 느낌이었다.

서가화는 문득 연못 위로 돌멩이를 던졌다. 돌이 떨어진 곳에서 물결이 일며 동그랗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서가화는 품 속에서 조그맣고 예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매화가 정교하게 수놓아진 그 주머니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나는 듯 했다.

“언니…. 천관에서 웬일이지?”

그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한쌍의 귀고리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교하게 세공(細工)한 귀고리에는 연푸른 녹색의 경옥(硬玉:비취)이 박혀 있어 고급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글쎄…? 이틀 동안의 대접도 그렇고 왠일인지 알 수가 없구나.”

송하령도 천관의 과분한 호의를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도 붉은 보석이 박힌 팔찌를 선물했지만 특별히 천관에서 그녀들에게 이런 선물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방관리들이라면 잘보이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 하지만 천관의 위세는 그것과 다르다. 오히려 강남의 공신가문이나 토호들을 감시하고 있는 곳이다.

“본가(本家)의 위세 때문은 절대 아니야. 그렇다고 그 상대부인가 하는 환관이 말했듯이 우리에게 무례를 범해 미안해서 그런다지만 사실 전영반이 찾아와 몇 마디 말을 나눈 것 외에는 없었거든.”

상대부는 그녀들에게 무례했다고 사과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례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전연부가 허창(許昌)의 천품관(天稟館)을 찾아와 조심스레 신문한 것이 고작이다.

“천관이 아무리 위세를 떨친다고 하지만 강남서가를 무시할 수 있겠니? 잘 지내자는 뜻이겠지. 네가 돌아가 타지에 나온 너를 못살게 굴었다고 말한다면 그들이라고 평안할까?”

“피-- 이-- 그건 아닐거라 언니도 알잖아.”
“그런 연유가 다는 아니겠지만 무시하지는 못해. 좋게 생각하자구나.”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남서가를 무시할 곳은 아직 없다. 그러나 정작 그녀들은 모른다. 풍운삼절이 천관에서 보낸 인물들임을 알았다면 그녀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천관과 강남서가와의 관계도 껄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밝혀질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발이 저린 격이다.

“여기에 나와 있었구먼.”

뒤에서 갈유의 목소리가 들리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들의 시선에 갈유와 세명의 소림승이 보였다. 이미 장격각에서 광지선사와는 인사를 나누어서 알고 있는 터. 허나 갈유의 얼굴엔 다소 부담스런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서낭자 고모댁이 개봉이라 했었나?”

갈유의 물음에 서가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갈유에게 말했던 바였다. 젊은 처자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 소림사행은 어른들의 시킨 일이었기에 서가화는 송하령을 졸라 이곳저곳을 다녀보고 싶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첫 번째 행선지가 개봉에 있는 고모집이었고, 우선 그곳을 들르자고 했었다.

“예. 찾아 뵙겠다고 이미 전갈도 해 두었어요. 무슨 일이신지?”

혹시나 이미 승낙했던 갈유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 싶어 못을 박는 말이었다. 그 말에 갈유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더니 광지선사를 바라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구려. 선사와 동행하리다. 다만 두 낭자는 개봉에 데려다 주고 가야겠소이다.”

무언가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본의 아니게 소림에서 식객 노릇을 한 탓에 간곡히 부탁하는 광지선사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 두 사람을 변명삼아 피하려 했던 것인데 서가화의 대답이 별 변명거리가 되지 않은 것이다.

“아미타불. 갈시주께서 승낙을 해 주시니 감사하오이다. 두 분 여시주는 어차피 가는 길에 들를 수 있을 터인즉 잘 된 일이오.”

갈유는 못내 마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의원이 자꾸 무림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중원에서 갈유를 평가하자면 갈유 역시 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갈유는 서가화와 송하령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며칠 쉬려 했더니 일이 생겼어. 내일 아침 일찍 떠날터이니 준비들 하시게.”
“어디로 가시게요?”
“산서(山西) 진성현(晋城縣)이외다.”

서가화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광지선사였다. 진성현이라면 개봉을 들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돌아가야 하지만 이미 광지선사는 개봉을 들르겠다고 말한 관계로 갈유는 더 이상 변명하지 못했던 것이다.

“몇일 다녀 오면 될 것이니 개봉에 머물러 있으시게.”

갈유는 여전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갈유의 표정과는 반대로 서가화는 오히려 반가워 하고 있었다. 그만큼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