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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국경지대 포이펫의 밤

아하, 밤이 점점 어두워 간다.
국경의 밤이 저 혼자 시름없이 어두워 간다.


(김동환/국경의 밤)

캄보디아 국경지대 포이펫에 스르르 어둠이 찾아오면 이곳은 또 다른 세상이 된다.
연민인지 고통인지 모를 내 가슴 속 가장 깊숙한 감정의 샘을 수시로 자극하던 낮 동안의 별별 모습들이 마치 이미 그려져 있었던 도화지 그림을 검은색 물감으로 모두 덮어버린 듯 말끔히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대신 그 곳에는 곳곳에서 성업 중인 카지노호텔의 불빛과 그 불빛 아래 드문드문 보이는 호텔 직영의 씨푸드 노천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여유로운 음악소리와 함께 석쇠에서 익고 있는 각종 해산물의 풍부한 냄새가 가끔 후각을 자극하기도 하는 조용한 국경의 밤풍경이 새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내일 아침 굳게 닫힌 태국 국경이 덜컹 열리자마자 곧바로 국경을 넘기 위해 보세구역의 한 카지노호텔에서 매우 이색적인 국경의 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정리가 안 되고 왠지 소란스러운 낮 풍경은 이미 인간의 꿈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그냥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쥐 죽은 듯 숨어있는 것일까?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조용한 국경의 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는 보다 더 속물스러운 인간의 도박 본능이 소박한 카지노의 네온간판 아래 꿈틀거리고 있었다.

육수가 시원하면서도 약간 달착지근한 느낌이 나는 캄보디아식 쌀국수로 시장기를 채운 후 호텔 주변을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다 로비에서 한 한국인 여행객을 우연히 만났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사는 캄보디아 어린이들이 불쌍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그들에게 나눠주려고 크레파스와 연필 같은 학용품을 조금 가지고 왔는데 국경지대에서 불쌍하게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함부로 이것저것 주지 말라는 가이드의 엄포에 겁이 나 맘대로 주지 못하겠다며 고민하던 이 중년 아줌마, 결국 호텔 프론트 직원에게 아이들 가져다 주라며 통째로 맡겨버림으로써 고민의 짐을 벗어던졌다.

하긴 이곳 국경지대에서 한번이라도 그 불쌍한 아이들을 접한 사람이라면 그녀의 고민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구걸이란 것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최후의 방편이라기보다는 이미 사업이 되어버린 듯 능숙한 느낌이 드는 구걸 소녀들이 한없이 불쌍하긴 하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당돌한 영악스러움에 가끔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조용한 국경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침대 속 깊은 잠에 빠진 나는 우습게도 꿈속에서 학용품이 아닌 1달러를 달라 외치는 맨발의 구걸소녀를 만나고 있었다.

국경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 꼬리를 이어 태국쪽으로 들어가는 캄보디아 사람들, 포이펫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아침풍경이다.
ⓒ 김정은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나 태국국경의 닫힌 문앞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수없이 많은 캄보디아인들과 함께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서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태국 국경 아란 지역으로 출근하는 캄보디아 사람들로 여권과 비자 없이 통행권만으로 매일 아침, 저녁 제한된 구역이나마 국경을 내 집 드나들 듯 넘어 다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 주위에는 아침을 거른 이들이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노상 음식점이 성업중이다. 가난하지만 활발하고 생기 넘치는 생활의 현장에서 미약하나마 삶에 녹아든 끈끈한 희망의 끈들….

드디어 국경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국경문을 통과하기위해 한꺼번에 모여들어 서로 빠져나가려고 아우성들이다. 태국 쪽 국경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특이한 아침 풍경이 아닐 수 없다.

▲ 캄보디아 국경으로 들어가는 여러 생필품들.. 국경지대에서 양국의 미묘한 경제력 차이를 느낄 수 된다.
ⓒ 김정은
그러나 아침에 이 많은 사람들이 미끄러지듯이 한꺼번에 국경을 통과하고 나면 그 후부터 캄보디아쪽 국경은 퇴근시간이 되기 전까지 한산해지고 대신 그 이후부터는 여행객이나 과일, 채소 등등의 각종 소비재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나 차량으로 캄보디아 쪽 국경이 항상 붐비기 마련이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실감할 수 있는 양국의 경제력의 차이. 이들은 왜 그들보다 가난하게 살까? 게을러서, 자원이 풍부하지 못해서, 그도 저도 아니면 순간의 선택을 잘못한 탓일까?

다시 한 번 부족하나마 주마간산 여행을 하면서도 마음속에 앙코르와트에 대한 자긍심을 지닌 채 이웃나라나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리 저리 휘둘리고 상처를 입은 그네들의 불행한 역사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처럼 똑같이 식민지시대와 독립운동, 그리고 참혹한 전쟁을 겪은 우리 역사의 아픈 생채기의 흔적을 느끼게 되었다.

문득 "역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던 E.H 카아의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 없이 오늘의 나와 앞으로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2004년 12월, 마치 영화 주인공처럼 앙코르와트의 먼지 쌓인 벽 속에 멋있게 내 기억들을 봉인하기 위해 떠났던 이번 여행이 오히려 유독 뭔가 부족하고 아쉬웠던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 찾아 헤매다 오히려 길을 잃어버린 형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 몸은 이미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버렸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 앙코르 와트를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10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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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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