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상대적으로 나이 많으신 분들 눈에 비친 내 삶이란, 사실 별로 산 것 같지도 않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20줄. 무어 그리 할 말이 많나하는 핀잔을 받을게 뻔하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만치나마 나는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어느새 05학번 후배들이, 재롱떨고 밥 얻어먹는 절대 특권을 가진 새내기 자리를 잠식했듯, 그만큼 나이 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지루한 인생사 운운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 인생사 속에서 만난 필요이자 필연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그 거창한 만남이란 바로 글 쓰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겐 글 쓰는 일이 꼭 필요한 일이자, 필연처럼 느껴지는 일이다.

글쓰기에 있어서 필요란, 친구 녀석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한 노력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디 가면 이른바 ‘싸움 짱’이란 것이 있고 ‘공부 짱’이란 것이 있듯이 저 녀석은 그래도 글은 좀 하더라 하는, 동네에 딱 하나 있는 떡방아집 주인이 되고 싶다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한창 옆에 있는 녀석을 내리 누르며 사회의 승자 패자 서열 메커니즘을 연습하는 시기엔 꼭 필요한 일이었던 듯싶다. 덕분에 학교 바닥에서만 글로 통했다. <오마이뉴스>에서 글 쓴다는 사실이 ‘아우라’를 만들긴 만들었나 보다.

글 쓰는 필연이란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이 사람이 무엇하고 있나 살펴보면 나타나는 것 같다. 내 경우에 그냥 내버려 두면 잠을 자거나 게임 따위로 소일하려 하지만 그렇게 보내는 시간을 굉장히 아쉬워하며 자신을 괴롭힌다. 그래서 그날 일기에 한심하다 쓴다. ‘이런 한심한 치 같으니.’ 그렇게 이틀에 한 번은 쓰고, 아주 가끔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오마이에 올릴 량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쓰는 과정은 상당히 괴롭다. 최근에 쓴 글과 지금 쓰려는 글의 시간적 간격이 길게 벌어질수록 더 심하다. 게다가 남들이 보는 글을 써야 하기에 확 긴장을 하다보면 자꾸 소화불량에 걸린다. 그래도 다 쓰고 나서 느끼는 일종의 심적 정화를 위해 쓰고 있다.

필요였든 필연이었던 간에 오마이뉴스는 내 글 쓰는 행동에 확실한 목적이 되어 준 것 같다. 즉 구심점이었던 셈인데 지나온 글들을 보면서 당시 애환이 묻어 뭉클하기도 하고 스스로 참 재밌다 생각하기도 한다. 어쩌면 당시 생활을 일일이, 또 치열하게 기록해 놓은 일기장 같다. 이런 측면에서 오마이뉴스를 알고부터 글을 써온 시간은 ‘오마이뉴스 라이프’였던 셈. 비록 강훈이 라이프가 오마이뉴스 라이프와 동일시 될 수 없을지언정 분명 오마이뉴스 라이프가 강훈이 라이프의 한 부분이긴 했다.

천원의 행복, 초기의 오마이뉴스와 내 시민기자 태동기

엄한 중학교 교칙 탓에 얼마 되지 않는 머리털만큼이나 모든 게 생경했던 시절, 오마이뉴스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당시 꿈이 기자였던지라 신문 따위는 제법 자세히 보고 있었는데 각종 언론에서 오마이뉴스에 대해 관심 있게 조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까진 별다른 세력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당시 존경해마지 않던 국사 선생님이 국사 시간에 직접 언급하셨다.

“오마이뉴스라는 게 생겼다고 합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직접 글 써보고 공부해 보세요.”

국사 선생님은 당시에 참으로 멋진 사람이었다. 항상 정의감에 넘치고, 게으름과 몰상식한 학생들에겐 항상 정의라는 이름 하에 꿀밤을 날리시던(덕분에 많이 맞고 많이 사람 되었다)훌륭하신 분. 어쩌면 내 우상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책이라면 다 찾아보려 애썼고 그분의 사상을 채택하여 모 3사 신문을 굉장히 싫어하기도 했다(지금도 형편은 다르지 않다).

그런 형편에 선생님 말씀에 오마이뉴스라는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머리 속에 알전구가 빛을 발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도서관에 들러 컴퓨터 실습실을 찾아가 오마이뉴스 사이트를 방문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 그 구호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꿈이 기자인데, 모든 시민이 기자라니. 분명 회사 측에서 제시하는 모토와는 엉뚱한 방향으로 오마이뉴스에 대해 인식해 버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쩌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분명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오마이뉴스에서 잘 활동하다 보면 먼 미래에 기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과감히 독자회원이 아닌 기자회원 가입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훌륭한 ‘생각’이었을 뿐 실행에 있어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처음부터 쉽지 않았던 것. 오마이뉴스에서 이른바 읽힐 만한 글을 송고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수련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엔 어린 마음에서 단순히 눈에 밟히는 주변 사안을 두고 독설과 억설을 섞어서 글을 써댔다. 결과는 당연히 참혹할 수밖에. 불씨 하나 없는 앙상한 생나무 처리는 그 후로도 줄곧 이어졌다.

이렇게 냉정 하다니……. 어쩌면 그 나이 때 감성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이른 패배를 맛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려오는 가슴에서 억지로 패배감을 씻으며 그래도 꾸준히 글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복잡했던 가정 사정과 고등학교 입학으로 급변하던 주변 환경에도 의연함을 기억하겠다는 주제로 쓴 글이 처음 잉걸에 올랐다. 지금 <즐거운 대딩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송고하고 있는 ‘사는 이야기’ 섹션이었다.

원고료 란에 업데이트된 글자 천원! 지금이야 2천원이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잉걸 기사는 천원이었다. 울컥했던 가슴 속 한은 삽시간에 미소로 승화되었다. 단 한 편, 처음으로 인정받은 천원의 잉걸기사가 오마이뉴스 글쓰기에 적잖은 동기 부여를 해준 셈이다.

무지가 불러온 용기, 그에 따른 고통들

첫 잉걸 기사 게재에 대한 기쁨도 잊고 본격적으로 학업과 더불어 자습을 통한 오마이뉴스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분야는 사회 문제에서 도서 평, 영화 평으로 넓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당시 가장 관심이 있던 섹션은 사회였다. 아직 사회엔 발도 들여놓지 않은 애송이였으나, 내가 사는 사회, 국가에 대한 관심은 스스로 보아도 진지했다. 우리 사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온갖 부조리, 불평등한 상황은 메마른 감성에 불을 놓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이상한 메일을 접했다. 발신은 <민족문제연구소>란 곳이었고 서신 내용은 기부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단체였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인터넷 사이트를 직접 방문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인명사전을 만드는 민간단체라고 했다. 친일 인명사전은 잘 몰랐으나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해방 이후에도 친일 행위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계간지를 통해서나마 접했던 상태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심한 재정난에 빠져있었다고 했다. 천명에 달하는 회원들의 기부로 꾸려가고 있었기에 문제는 자못 심각해 보였다. 상황을 냉정히 조명하지는 못했으나 국가적인 측면이 아닌 일개 민간단체에서 고전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짧은 글이나마 이 소식을 전했다.

그 글은 잉걸에 머물렀다. 당시에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은 시기여서 비교적 처음에 가까운 때에 발화한 것이지만 내 문장력과 호소력은 너무도 어설프고 미미한 것이었다. 그 때 처음 느낀 것은 화두를 제시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과 능력과 결단력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두를 던질 수 있는 기회는 그 다음에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 선거철 오마이뉴스의 행태를 관망하면서 포착할 수 있었다. 당시 오마이뉴스의 강력한 팬이었던 나는 오마이뉴스를 자주 방문하면서 대통령 후보에 대한 회사 측의 자세를 나름대로 모니터했다. 당시의 오마이뉴스는 자의든 타의든 노 후보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가 많았다. 나는 그런 상황을 두고 오마이뉴스에서 특정 후보를 편들고 있다고 규정했다.

지금에야 특정 후보 지지에 대한 언론계의 논의가 어느 정도는 진행된 상황이지만(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마이뉴스 이외에 다른 매체들에 경우에는 간접적인 측면이 아니면 대놓고 지지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다) 당시에 그 일은 분명한 논쟁거리였다.

개인적인 소신으로 언론사는 중립을 지켜야 하며 그것은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의 경우에도 피해갈 수 없는 상식의 금기였다. 개인적으로도 노 후보를 지지했기에 화두를 꺼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언론은 중립이라는 고정관념 말고도 만일 노 후보가 집권하고 나서 그가 국정을 잘 이끌어나가지 못했을 경우에 오마이뉴스가 과연 노 후보를 객관적으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에 화두를 던졌다.

오마이뉴스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 쓴 글을 톱기사에 가감 없이 실었다. 항상 잉걸 기사만 채택 되고 있던 터라 나는 이게 웬일인가 신바람이 났다.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다. 지금도 넘기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조회수와 광고 원고료가 들어왔다. 굉장한 반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신바람은 실로 오래가지 못했다. 찬성파가 있었던 만큼 당대 지식인들의 놀라운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관련
기사
오마이뉴스 특정인사 편들기 안된다


외국의 경우에는 대통령 선거철이 다가오면 당당하게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는 반론이 이어졌고, 어느 사람은 나를 ‘반 오마이뉴스 반 진보 세력’으로 낙인찍어 공격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성적인 반론을 해주면 좋긴 한데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내 이름을 두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으로 일관하기도 했다. 사이버 테러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오마이뉴스에서 노 후보 관련 도서를 광고하고 있던 어떤 출판사에서는 정정기사를 내지 않을 경우 형사고발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나는 그때부터 일종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괜히 내가 화두를 던져놓고 이용당한 듯한 생각이 들어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오마이뉴스를 걱정하던 나는 논란의 가운데서 초범이라는 멍에만 쓰고 말았다. 그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단연 무지의 소산이었다(물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리 쓰긴 할 것이다. 물론 다른 측면에서.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급진적인 지지를 받을 준비가 안 되어있다. 만일 일이 잘 안 풀릴 경우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하고 우회적으로 풀어내긴 할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언론사에게 완벽한 중립을 요구할 만큼 우리 사회가 건전하지도 않으며 사실상의 편향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일을 겪고 난 후에 알게 된 일이었다).

말조심해야 한다는 것, 인터넷매체의 영향력이 이렇게 일파만파라는 것을 실컷 여론의 태풍에 당한 후에나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소심한 고등학생의 마음은 이렇게 스스로 겪으면서 강해지고 있었다.

즐거운 고딩일기

사회 섹션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나 여론의 홍역을 치르고 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직접적인 조언자였던 엄마는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가타부타 시비를 가리는 모습이 영 좋지 않다고 하셨다. 그것은 내 소신을 두고 하는 말씀이셨기에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래서 글 쓰는 분야를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기자가 될 수 있다면, 글을 쓰는 일이라면 역시 똑같이 않을까? 언젠가 진정으로 영특해지고 여론의 압박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그 때 기똥찬 사회 섹션 기사를 쓰자고 스스로를 달래며 수필분야에 해당하는 사는 이야기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 시기는 고등학교 생활을 1년 남겨둔 때. 즉 고3 올라가는 시기였다. 이제 1년만 있으면 고등학생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당시에 내가 보기엔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었다. 특히 사회인의 목소리가 주를 이루는 오마이뉴스 지면에서 만일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쓴다면 어쩌면 경쟁력 있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추억의 공유이자 교육 문제에 대한 풀이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상황은 역시 오마이뉴스에 처음 글을 송고하던 시절로 회기하고 말았다. 역시 기획취지는 좋았지만 회사 측에서는 내 글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까지도 필력과 주제 선정 능력이 짧았기에 비중 있는 지면에 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다섯 편 정도를 ‘사는이야기’ 섹션에 실어도 역시 잉걸이었기에 자꾸 조바심과 더불어 욕심이 났다. 공부 시간 이외에 글을 썼기 때문에 자괴감이 더해서 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턱대고 오마이뉴스 기자님께 서신을 보내 조언해 달라고 했다.

“제가 어떻게 쓰면 잉걸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 글이 어떤 면에서 많이 부족합니까?”

편집진 측에서는 마음 급한 나를 잘 달래주셨다.

“그냥 그런 부담 가지지 말고 쓰세요. 오마이뉴스에는 서강훈 기자님 말고도 내로라하는 교수님부터 교사 전문직 종사자까지 훌륭한 필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잉걸만 써 내는 것도 어쩌면 잘 하는 일이지요. 조바심 갖지 말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위주로 쓰시면 될 거에요.”

편집기자의 편지를 받고나서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그간 써온 글의 문제점을 생각했다. 전체 고등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단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에 치우쳤다. 글들 사이에 연대 의식이 없다. 재미가 없다. 이런 문제점을 두고 나는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고등학생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글의 주제를 생활기와 교육 문제 전반에 대한 것으로 바꾸어 나갔다. 고등학교라는 공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는 달리 참으로 많은 문제를 내포한 곳이었다. 전 근대적인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과거의 가치관과 신세대의 욕망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예민한 사항을 포착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글들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 의식을 위해서는 이 글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전체 주제가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회사 측에 연재 신청을 했다. 신청은 성공이었다. 비록 연재 기준이 바뀌기는 했으나 과거 있었던 기준의 마지막 수혜자로 나를 선택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즐거운 고딩일기>라는 타이틀을 내 걸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글의 재미를 위해서 나는 현장성과 기동성을 높인 카메라 폰 사진들을 싣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수학 책을 베개 삼아 베고 자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 화장실 야한 낙서들. 담을 넘는 친구 모습 등등……. 주제는 참으로 무궁무진했고 스스로 즐거웠으며 코믹스러운 것들이었다.

글들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던 듯싶다. 우선 비교적 어린 나이에 연재를 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 칭찬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저마다 당신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의 학교에 대한 걱정을 줄여드리기도 한 것 같다. 이에 따라 몇몇 잡지 등에서 인터뷰 요청을 하기도 했고, 지역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반응을 보고 대학입시에도 활용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자기추천제나 특기자 전형이 있는 대학에 무턱대고 응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어디에서도 일련의 활동을 재능이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대학의 수시결과가 발표되던 날 나는 조용히 학교 건물 뒤쪽에 가서 속으로만 울었다. 주변인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터라 그 고통과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써온 일련의 글쓰기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저 실력으로 수능을 치르자고 마음먹고는 약간 글쓰기를 줄인 다음에 수능 공부에 매진했다. 목표는 중상위권 인문계 대학. 왠지 자신 있었고, 전략적으로 투자한 과목은 그래도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병행한 학업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능 날. 너무 긴장을 했던 탓인지 그만 중요한 전략 과목 중 하나인 언어영역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여태까지 쳐 왔던 시험 중 최악의 성적. 수도 없이 많은 문제지를 풀었고 모의고사를 풀었지만 이런 점수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 수 없이 명문대는커녕 중위권 대학을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형편없는 점수로는 그마저 힘겨워 보였다.

게다가 당시에 꿈꾸던 사회대나 사회과학부는 집안의 거센 반대로 응시조차 하지 못했다. 따라서 집안의 여론을 고려하고 내 꿈을 조합하여 중위권 사범대학에 원서를 넣기로 합의했다. 서울에 있는 사범대학의 경우에는 면접을 보지 않았으나 지방에 있는 국립 사범대의 경우 면접과 논술을 보았다.

서울에 있는 중하위권 사범대는 합격했지만 학비가 비싸고 인지도도 없었기에 그곳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방 국립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면접시험을 치르러 내려갔다.

면접시험을 치르기 전 나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써왔던 글들. 내가 낙방한 대학들. 나는 입을 지그시 다물고는 이게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더 이상 물러서면 재수다. 그런데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다. 그 고린내 같은 공부를 또 해야 하다니……. 게다가 재수를 하게 될 경우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내 모든 걸 논술과 면접에 쏟기로 했다. 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오마이뉴스에서 써왔던 글과, 그로인해 성장해 버린 시사상식이 내 든든한 원군이 되었다. 결과는 합격. 수능 점수로는 낙방이 확실하던 대학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오마이뉴스에서 활동한 경험이 내게 희망으로 가는 막차 티켓을 선물한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오마이뉴스를 좋아하는 데는 이렇듯 다 이유가 있다.

내 인생이란 이름의 옷감을 짜나가는 과정

시끌벅적 엄청난 긴장과 스펙터클이 넘쳤던 내 오마이뉴스 이야기는 지금부터는 내리막이다. 부끄럽게도 1년여간 대학 생활을 하면서 쓴 글은 채 20편이 안 된다. 글을 쓰게 해 달라고 신께 빌고, 또 부모님께 요구했던 과거 진지한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 또한 연재를 다시하면 조금 변할까 싶어 '대딩일기'를 연재하게 해달라고 회사 측에 요청했더니 특별한 면모가 없으니 사절이라고 했다. 나도 이제 사회라는 클럽에서 준회원은 되므로 더 이상 귀엽지도 않고 특별히 어필할 것이 없나보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 자연스러운 일일뿐.

지금은 생각나는 주제가 있으면 조용히 노트에 써 놨다가 아무도 없는 시간대에 컴퓨터로 글을 쓸 뿐이다. 나를 인터뷰하려던 메일 쪽지 전화는 끊긴 지 정확히 1년이다.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지만 그 거만하던 자부심조차 잊을 정도로 확실히 잊혀지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상황을 더욱 사랑한다.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대로 용감해 진다. 과거는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사회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랬기에 글을 써도 조심스럽지 못했고 공격적으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다만 내가 잘 몰랐다는 것을 알 정도만 될 뿐. 그래서 나는 고요해 지려고 했다. 변태(變態)를 기다리는 애벌레처럼 고요하고 느리지만 조금씩 전진하는 존재. 나는 그렇게 변하고 싶다.

오마이뉴스 글쓰기는 어느새 애벌레걸음처럼 담담해진다. 그래도 한 땀 한 땀씩 짜 나가고 있다. 목적은 내 인생이라는 옷감을 완성하는 것. 불확실한 기억보다는 여전히 오마이뉴스라는 종이를 통해서 기록되기를 선호한다.

요즘의 내 글들은 전부 다 기사 하단, 취재경위에 이런 멘트를 쓰곤 한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와 나 응모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