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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들어서기 전부터 코를 찌르는 홍어 삭히는 냄새는 바로 벽에 큼직한 몇 개의 덩어리로 잘린 채 걸려있는 홍어들이 바로 뿜어내는 것이었군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천주교 선교사이기도 했던 정약전은 신유박해때 흑산도에 유배되어 생활했는데 사는 곳이 섬인지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어류학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집필했습니다.
그 옛날에도 흑산도에서는 홍어가 많이 잡혔나봅니다. 자산어보에는 홍어를 분어라고 하고 속명을 홍어(洪魚)라 하였답니다. 또 홍어의 형태와 생태를 관찰 기록하였고 음식으로서 나주(羅州)지방의 홍어에 대한 기호(嗜好)를 소개하고 있습니다.(Naver 백과사전 참조)
그러고 보면 홍어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가게 문 앞에 쌓여있는 요 녀석들이야 흑산도 홍어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저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오긴 했지만 나중에 먹어보고서야 알았지만 찰진 육질이 흑산도 홍어 못지않더군요.
보기엔 홍어의 껍질 색깔이 더해져 무척이나 지저분해 보입니다. 하지만 모양 좋게 썰어만 놓으면 그런 생각을 싹 잊을 만큼 맛있는 게 또 홍어!
좁은 방안에서 두 분이서 누가 들어온 줄도 모르게 홍어 썰기 삼매에 빠져 계십니다.
"고무신집 아들인데요, 어머니가 홍어 맡겨놓으셨다고 해서 찾으러 왔어요."
"그래? 니가 상혁이냐? 아따, 많이 커브렀네. 인자 길에서 보믄 몰라보겄다."
"장가는 갔냐?"
"…."
늘 이야기의 끝은 결혼 이야기입니다.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저는 머리를 긁적여야 하지요.
홍어를 열심히 담고 계신 분은 어머니와 동갑인 친구 분이시랍니다.
고향에 내려오면 더욱 더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느그꺼 안썰었는디. 거그서 쪼금만 기다려라잉. 금방 썰랑게"
홍어를 썰고 계신 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더욱 더 빨라집니다.
조폭들이 들고 설쳐대던 회칼. 폭이 좁고 날렵하게 생겼습니다. 역시 회칼이 있어야할 곳은 조폭의 허리춤이 아니라 바로 저 아주머니의 손아귀임이 틀림없습니다.
큰 홍어를 손질하여 폭 7~8Cm의 긴 조각으로 만들고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칼을 비스듬히 눕혀 썰어냅니다. 홍어의 결을 살려서 써는 것이 요령.
똑같은 홍어라도 써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그 맛도 달라지는 건 어쩜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입구에 쌓여있는 홍어 다 썰려면 팔목 꽤나 아프시겠지만 돈 버는 재미에 아픈 것도 다 잊으시겠죠?
이제 아주머니는 하이얀 스티로폴 상자에 얇은 비닐을 깔고 예쁘게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한쪽 끝에는 코나 연골 같은 부분을 담고 나머지 공간에 썰어낸 홍어를 가지런히 놓습니다. 입에서는 침이 꼴깍 넘어가고 빨리 집에 가서 홍어 먹을 생각에 마음이 급해집니다.
비록 홍어 특유의 끈적거리는 점액 때문에 작업환경이 깨끗해 보이지 않지만 껍질을 여러 번 닦아내고 예쁘게 잘 썰어놓으면 홍어는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됩니다.
이제 집에 들고 가서 접시위에 수북이 홍어를 올려놓고 신김치에 어머니가 만드신 초장에 푸~욱 찍어 먹기만 하면 됩니다.
맛있는 홍어를 먹어 나도 즐겁고, 서울서 오랜만에 내려온 아들이 어머니가 주문해 놓은 홍어를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니 어머니도 즐겁고….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고등어가 아니라 홍어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고등어"가 아니라 "어머니와 홍어"입니다.
덧붙이는 글 | 바로 썬 홍어는 찰지고 싱싱한 맛으로 먹습니다.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둔 채로 이틀만 바깥에 내놓으면 살짝 삭은 것이 오히려 홍어의 맛을 좋게 합니다.
섬이 고향이신 우리 아버지는 싱싱한 걸 좋아하시고 저는 삭힌 걸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늘 홍어를 모두 삭혀버리신답니다. 아버지가 좀 섭섭하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