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이 책에는 '90대, 80대, 70대, 60대 4인의 메시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90대는 원로 수필가인 피천득, 80대는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유명한 김재순, 70대는 스님 법정, 60대는 <海神>과 <가족>의 소설가 최인호.
이들의 세상살이 경험과 학문의 연륜이 상당한 내면의 깊이를 지니고 있듯이, <대화>라는 단 두글자의 제목은 간결하면서도 무언(無言)의 힘을 지니고 있다. 166쪽 분량에다 사진도 더러 들어 있어 내용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정신적 연륜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대화집이기 때문일까. 이따금 다시 들춰보곤 하는, 오래오래 곱씹을 맛이 있는 책이 바로 <대화>다.
월간 <샘터> 지령 400호 기념으로 2003년 4월에 가졌던 대담을 채록하여 엮어 놓은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아름다운 인연, 잊을 수 없는 인연'(금아 피천득- 우암 김재순), 2부는 '산다는 것은 나누는 것입니다'(법정- 최인호).
아름다운 인연, 잊을 수 없는 인연
금아와 우암의 대화는 '인연' '신앙' '예술' '여성' '우리말' '우리교육' '정치' '다시 태어난다면' '나이 듦'을 화두(話頭)로 삼아 한마디 한마디 버릴 것 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암이 금아에게 전 생애를 통하여 가장 존경해 온 분을 묻자 금아는 도산(안창호)을 들었다. 도산은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동지에게 큰 해가 돌아갈 때만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럴 때도 침묵을 지키며 거짓말을 안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한편, 춘원 이광수에게서 시를 배운 인연이 있는 금아가 '그는 아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범하였었다.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라고 쓴 글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우암이 소개한다. 이에 대해 금아는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지기 전에 돌아가셨더라면 하는 마음을 글에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에 대하여' 꼭지에서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금아의 개방된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난 여성의 자립에 대해서 심정적으로 아주 관대해요. 독신이나 출산 기피 같은 현상도 개인의 사생활이니 옳다 그르다 말할 성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니 이래라 저래라 할 건 아니지요. 앞으로 그런 예가 더 많아지면 많아질지언정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고요. 출산 기피 같은 경우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개인의 자유인데요. 다만 간접적으로 출산을 장려하는 방법은 있을 거예요. 요즘은 과외비 비싸서 아이 못 낳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아이를 낳을 때 국가가 출산 비용이나 교육비를 부담해 주는 식으로 도와주는 방법이 있지요.
- <대화> 36~37쪽에서
금아는 산문을 쓰지 않은 지가 벌써 30년이 되었다고 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96세, 그러니까 60대에 절필하신 셈이다. 절필의 이유는 이렇다.
사람의 능력이란 게 한계가 있어요. 이제 내 한계에 도달했다. 그렇게 느낄 때는 바로 붓을 꺾어야 하지요. 그런데 쓰지 않으면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 같아서 전만 못한 글을 자꾸 써낸다 말이죠. 그러다 보면 글이 가치가 낮아지고, 허위가 되고, 수준 이하의 글쓰기를 되풀이하게 돼요. 이 이상 발전할 수 없다. 한계다, 이렇게 느낄 때는 살롱에 가서 술을 마시거나 잠자코 침묵하는 게 낫지요. 그런 이유에서 내가 산문 쓰기를 그만뒀는데, 시는 짧으면서도 함축성 있게 글을 쓸 수 있지 않아요? 구태여 시까지 쓰지 않을 필요가 있을까 해서 시는 써왔습니다.
- <대화> 28쪽에서
우암은 금아가 2002년 월드컵 때 <샘터>에 '붉은 악마'라는 시를 주었다며 소개했다.
붉은 악마들의 끓는 피,
슛! 슛! 슛!
볼이 적의 문을 부수는 저 아우성!
미쳤다 미쳤다 다들 미쳤다!
미치지 않은 사람은 정말 미친 사람이다
- <대화> 29쪽에서
늘 건강하시니까, 내년 독일 월드컵 때도 이런 재미있는 시를 우리에게 꼭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산다는 것은 나누는 것입니다
존경 받는 스님과 유명 작가와의 대화인 2부에서는 '행복' '사랑' '가족' '자아' '말과 글' '업' '시대' '깨어 있음' '여유' '이웃' '죽음'을 화두로 삼아 종교적 사색이 깊이 깔려 이어지고 있다.
'가족'을 화두로 한 꼭지에서 법정 스님이 "최 선생 따님 다혜는 미국에서 잘 살고 있나요?" 하고 물었을 때 나눈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최인호 : 네, 딸아이는 지금 손녀와 같이 서울에 와 있어요. 손녀를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고, 불교에서도 '천진불(天眞佛)'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혜월 스님도 동자승에게서 천진(天眞)을 배웠다 했고요. 전에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몰랐는데 이젠 확실히 알겠습니다. 아이가 아이가 아니더라고요. 아주 신비합니다.
법정 : 영혼에는 나이가 없으니까요. 단지 육신을 가지고 나온 시간이 얼마 안 되었을 뿐 몇 번의 생을 겪고 나온 것이잖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라든가, 배울 새도 없었을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지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그 소리입니다. 육신의 나이로 아이를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해야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 <대화> 90~91쪽에서
세상에는 오직 '나이'만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른 점에서는 남보다 난 것도 없고 든 것도 없고 된 것은 더욱 없으니까, 속세의 '나이' 자랑만을 하며 윗사람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삼류소설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 가령 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 수 있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소형 승용차를 중형 승용차로 바꿀 수 있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우둔한 처세술일 뿐이다.
술 몇 잔 들어가면 자기가 나이가 많으니까 형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건 조폭 사회에서나 필요한 번데기 껍질 같은 것이 아닌가. 어차피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면 벗어버려야 할 껍질, 그런 건 미리 벗어버리고 책 한권 더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깊은 사색을 두루 여행할 수 있는 기쁨
주말부터 시작된 맹추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삼한사온(三寒四溫)의 법칙에 희망을 걸면 오늘은 날이 좀 풀리려나. 풀리겠지. 오늘이 바로, <오마이뉴스> 창간 5주년 기념일이니까.
<대화>. 이불 속에 엎드려, 군고구마 먹으면서 읽기에 딱 좋은 책이다. 60대에서 90대까지의 깨어 있는 깊은 사색을 두루 여행할 수 있다. 그분들의 깨끗한 영혼('죽은 사람의 넋'의 의미가 아니라, '육체와 함께 인간을 이루되 신령하여 불사 불멸하는 정신'의 의미로서)을 가슴으로 만날 수 있다. 책장을 살며시 덮는 순간, 자신의 가슴으로 어느 사이, 감로수(甘露水)가 따뜻하게 스며든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당이 골백번 창당되고 당 이름이 골백번 바뀌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철새 위정자(爲政者)들에게 이 책을 특히 권하고 싶다.
"'을사늑약' 100주년인 올해에는 당파싸움만 하지 말고, 제발 '대화' 좀 하고 사소서."
덧붙이는 글 | <대화> 피천득·김재순·법정·최인호 대담/2004년 10월 15일 샘터사 펴냄/하드커버 223×152mm(A5신) 168쪽/값 9000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생명 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기하거나 서평을 주로 쓰고 있으며,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다. 한편, 현대사를 다룬 신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하반기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