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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셋 - 분유통, 솔방울, 신나는 쥐불놀이
대보름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쥐불놀이일 것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대보름이 되기 일주일 전부터 무척이나 바빠졌다. 보름날밤 쥐불놀이에 쓸 '무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나 역시도 쥐불놀이 깡통에 들어갈 땔감을 주우러 다섯 살 위 오빠를 따라 산을 헤집고 다녔다. 불이 빨리 붙으려면 잘 마른 솔가지(솔잎을 이렇게 불렀다)가 필요했고 오랫동안 타오르기 위해서는 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도 필요했다. 나뭇가지는 깡통 크기에 맞춰 잘라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아직 어렸던 나는 나뭇가지 대신 솔방울을 주우러 다녔다.
땔감 말고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깡통이다. 귀한 손님 오셨을 때나 내놓던 황도, 백도 통조림통이 그나마 흔했고 간혹 가다가 꽁치통조림통이 끼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깡통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바로 분유깡통이었다. 크기가 커서 한번 불이 붙으면 화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때는 분유회사도 몇 개 안 될 때라서 눈이 똥그란 아기가 그려져 있던 'ㄴ'회사의 분유통이 대부분이었다.
솔가지와 솔방울이 마당에 소복이 쌓이면 본격적으로 무기 만들기에 돌입했다. 물론 나는 너무 어려서 옆에서 오빠가 하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지만. 첫 번째 과정은 깡통에 못질하기. 멀리서도 불빛이 제대로 보이려면 구멍이 많을수록 좋았다. 성격이 꼼꼼했던 오빠는 마치 눈금종이를 대고 뚫은 듯 줄을 맞춰 구멍을 뚫었다.
깡통에 구멍 뚫기가 끝나면 깡통을 돌릴 수 있도록 굵은 철사를 연결했다. 이것 역시 펜치를 이용한 고난도 작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오빠 옆에서 구경만 했다.
드디어 대보름날 밤. 일 년 중 가장 크고 둥근 달이 산허리에 걸리면 동네 아이들은 하나둘씩 우리 집 옆에 있는 넓은 밭으로 나왔다. 그 밭은 여름날 옥수수 같은 것을 심던 밭이었는데 넓기도 하고 주변에 집도 없어서 쥐불놀이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빠는 양손에 두개씩 깡통을 매달고 보무도 당당하게 집을 나섰다. 나도 백도 깡통을 들고 분유깡통을 든 오빠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물론 나도 분유깡통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분유깡통은 내가 들기엔 너무 크고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다.
널따란 밭 한가운데 아이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고 나면 저마다 자기 깡통에 불을 붙여 돌리기 시작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벌건 불빛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한참을 돌리다가 휘익, 하고 손에서 철사 줄을 놓아버리는 순간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밭 한가운데 떨어져 빨간 빛가루를 뿜어대던 장관이란!
28년 전 옛날 일이라 그리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황홀한 순간만은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묵나물 한 접시에 나는 28년 전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냈다. 자세하고 정확하진 않지만 순간순간 선명한 스틸사진처럼 남아 있는 대보름날의 기억들. 그 조각들을 맞춰가며 연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지금도 여전히 부모님은 동네아저씨들이 여자한복을 갈아입던 바로 그 집에서 살고 계신다. 그러나 그 집에는 더 이상 대보름날이라도 동네 아저씨들이 모이지 않는다. 깡통에 구멍을 뚫는 아이들도 없다. 열나흘날 밤에 그 시끄럽던 '돼지 멱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28년 전 대보름날은 그저 세월을 훌쩍 지나 다 자라버린 내 머리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나마 이런 '대보름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이렇게 미소 짓게 만드는 기억의 조각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2005. 2. 22. 제 개인 홈피에 실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