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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산문집 <비어 있는 자리> 표지
나의 첫 산문집 <비어 있는 자리> 표지 ⓒ 박도
“내일은 학년 말 진급사정회 날이니 내일까지는 꼭 납부해야 한다”는 말을 얼더듬으면서 전했더니 그들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물을 글썽이며 귀가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세 자리가 빈 날은 처음이고 어제 눈물을 글썽이며 풀이 죽어 돌아가던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라 온종일 마음이 시큰했다.

‘가난이 죄’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나 자신 몸소 체험하기도 했지만 채 피지도 못한 그들에게 그 말을 어떻게 일러줄까? 나도 학창시절 등록금 독촉으로 무척 시달렸는데 그때 등록금을 독촉하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왜 그토록 매정스럽고 무섭게 보였던가!

어제까지 개근했던 세 녀석은 오늘은 등교도 못한 채 어쩌면 세상을, 부모님을, 담임선생을 원망하고 있을 게다. 오늘따라 ‘선생님’이라는 존칭이 거추장스럽고 교단에 선 게 후회스러워 어디 가서 한바탕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

영호, 화영, 현수 - 너희들이 등교하는 날, 내 우울한 마음은 활짝 개이리라.
-<독서신문> 1973. 3. 5.

유학생이 모아서 보내준 장학금

이 글이 나간 뒤 한 달 남짓한 동안에 100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 수녀님, 스님, 유학생, 대학 때 여자친구 … 그 가운데 미국 버클리대학의 유학생 최성찬씨는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이 주일 예배에 광고하여 모았다면서 100불을 교장선생님 앞으로 보내주었다(내가 돕지 못한 걸 유학생에게 신세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거절하였기에).

그 돈으로 두 학생의 한 기분 장학금을 주었다. 그때는 가난한 학생이 너무 많았고, 세 학생 등록금으로 모자라서 성적이 우수하고 가난한 학생에게 주었다.

그때 독서신문 편집자가 뽑은 ‘비어 있는 자리’라는 글 제목은 나의 첫 작품집 제목이 되었다. 책을 펴낼 때 60여 꼭지의 글 가운데 출판사 편집진도 그 제목을 뽑았다. 1980년대 말 그 책은 꽤 팔렸다.

30년만에 나타난 그는 <폭풍의 언덕>의 히스크리프처럼 아주 당당하고 귀티가 흘렀다. 그는 굳이 저녁을 사겠다면서 나를 태우고는 교외로 차머리를 돌렸다.

그는 중2를 최종 학력으로 중퇴하고 곧장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문구점 사무기기 기술자로 출발하여 26세에 오너로 독립, 지금은 시청 앞 새서울 지하상가에서 사무용품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묵직한 아픔

독학으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였으나 먹고사는 게 바빠서 대학은 진학치 못하였다고 했다. 어릴 때는 학력이 낮은 걸 많이 아파했지만 이제는 모두 극복하였다면서, 자기에게는 내가 몇 안 되는 선생님이기에, 뒤늦게라도 밥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때를 생각하니 내 처사가 잘못됨을 마음속으로 깊이 후회하면서도 차마 그에게 솔직히 참회의 말은 하지 못하고 ‘면목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체로 선생님들은 장학금 지급에 공부 잘하는 학생 순서로 혜택을 주는 데 익숙해 있다. 그때 유학생이 보내준 장학금은 세 학생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게 옳은 처사였다.

그는 갈비를 푸짐하게 사고는 굳이 자기 승용차로 내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내가 차 한 잔 들고 가라는 데도 예고 없이 사모님에게 결례할 수 없다면서 곧장 차를 돌리고는 선물꾸러미를 한 상자 안기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학벌이 없었기에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았을 거예요.”

30년 전에는 등록금을 못내 눈물 글썽이던 학생이 오늘은 중소기업의 대표로 활짝 웃는 모습이라서 보기에 좋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지난날 내가 스승답지 못했다는 묵직한 아픔이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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