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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신입생들은 부푼 꿈과 기대에 차 있다.
'인문학의 위기' 속에서도 신입생들은 부푼 꿈과 기대에 차 있다. ⓒ 박성필
필자는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입니다. 며칠 전 학과 학생회가 마련한 조촐한 행사에서 3월이면 입학하게 될 후배들과의 첫 대면이 있었습니다.

이제 스무 살의 문턱에 선 그들의 해맑은 표정을 보며 그들이 누비고 다닐 캠퍼스의 봄날을 그려보면서도 과연 그들이 언제까지 그 밝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필자가 재학 중인 학과의 정원은 30명입니다. 지난해 30명의 후배가 입학을 했지만 올해 2학년에 진급하는 학생은 22명뿐입니다. 3명의 후배가 군 입대를 했고 3명의 후배는 다른 학과를 찾기 위해 자퇴를 했습니다.

한 명의 후배는 '취업이 잘 된다'는 다른 학과로 전과를 했고 다른 한 명의 후배는 휴학을 했습니다. 나머지 22명의 후배들 중 절반은 복수전공을 신청해 승낙을 받았습니다.

'국어국문학과'라는 이름으로 설치된 학과에서 심혈을 기울여 언어나 문학을 공부하는 이가 몇 명이나 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풍경은 소위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제가 겪은 일화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개강을 앞두고 필자의 동기 한 명과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함께 간 동기는 필자의 왼쪽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우측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졸업한 학과 선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에 앉아 있는 같은 학과 학생 두 명, 그리고 그 학과를 졸업한지 이제 사흘도 채 지나지 않은 졸업생의 책상에 어떤 책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제 좌측에 앉아 있던 동기의 책상에는 <민법총칙>이란 제목의 두꺼운 법률 서적이 놓여 있었습니다. 우측 선배의 자리에는 공기업 취업을 위한 각종 예상문제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법률 서적을 보고 있던 동기생은 국문과로 입학하여 법학과에서 복수전공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언젠가 그에게 "왜 법학과 복수전공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졸업할 무렵 사법고시를 볼 것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같은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법률 서적을 뒤적이고 있는 동기생이나 전공과는 거리가 먼 공기업 시험대비에 급급한 선배의 모습은 '인문학의 위기'가 처한 현실의 반증입니다.

필자가 감히 쓰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는 참 규정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이 '인문학의 위기'를 나름대로 규정하고 싶어 선후배 동기를 가리지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 냉철한 대답을 해 준 것은 고시준비를 하는 동기생이었습니다.

"인문학은 정말 밥벌어먹기 힘든 학문이고 취업하기 힘든 학문이고 사회로부터 좋은 시선 받기 힘든 학문 같다"라는 말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참 명쾌하면서도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인문학의 현주소입니다.

한때 현대사회를 가리켜 '기술이 바로 생산력으로 전화되는 시대'라고 규정한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 이 말은 '정보가 바로 생산력으로 전화되는 시대'라 규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기술'이나 '정보'를 가진 자들이 불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고 국제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제경쟁력을 계획하고 조절, 통제하기 위해서는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90년대 이후 이 땅의 정권을 잡았던 정치가들은 하나 같이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대학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대학발전계획은 여지없이 '이공계 중심'의 발전계획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한 논의가 진행될 때마다 인문학에 속한 학생들은 더 깊은 소외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비단 우리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은 아닙니다. 여러 논문이나 서적을 검토해 볼 때 이미 10여년 전부터 미국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유럽의 경우에도 최근 우수한 학생들이 소위 '문사철'이라 불리는 '철학, 문학, 역사학' 등을 기피하고 정보 기술 분야로 몰리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다루는 총체적인 학문영역입니다. 점차 사회가 현대화 정보화 되면서 정신보다는 물질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물신숭배와 배금주의 경향이 나타나면서 인간의 정신문화에 대한 관심이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 속에서 우리들이 지닌 가치관은 점차 획일화시키고 단순화시키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성찰은 없다 보니 주체적인 삶 역시 꾸리기가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은 훼손되고 사회는 인간적인 면모에서 일탈한 사건 사고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20대들의 일자리는 급속하게 줄었습니다. 청년실업이 급격히 증가했고 너도 나도 자신들이 속한 분야 학문이 '위기'에 처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반성적인 성찰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2001년, 다음해 열릴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이 우리의 '태극전사'들에게 기초 체력단련을 하고 있을 때 언론계 체육계 그리고 많은 국민들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표팀은 기초체력 훈련을 바탕으로 개인기와 팀워크를 조화시켜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우리들 앞에서 '현실'로 바꿔놓았습니다.

월드컵 4강 달성은 인문학의 위기에도 생생한 교훈을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잠들어 있는 인문학을 이제 잠에서 깨워야 합니다. 인문학에 종사하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젊은 인력과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20대의 대학생들이 '나도 인문학의 길을 걷겠노라' 외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육성책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기에 그 해결책을 마련해 달라는 필자의 주장 역시 고리타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할 때마다 나왔던 각종 대책들이 얼마나 시효성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버리고마는 '말잔치'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국어 영어 수학 등 '기초 과목'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기초 과목'에 해당하는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말을 좀처럼 들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공계들의 인재들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풍요롭게 만들어 놓는 물질 못지않게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운 관계로의 복원' 역시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식이 충만한 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학술인프라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필자가 재학 중인 학과에는 해마다 같은 인원의 후배가 들어왔습니다. 입학 초기에는 모두가 '문학에 관심이 있다' '언어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때 뜻을 같이 하는 선후배들이 모여 <문학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소모임이 꾸려졌고 필자는 한 해 그 모임의 대표직을 맡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문학으로 사는 사람들'이 생존할 수 없는 곳에 인문학이 처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학, 역사, 철학을 논하던 과거로 회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문학에 뜻을 품고 대학에 입학한 스무 살짜리 후배들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올해에도 저 꿈 많은 후배들에게서 '어느 학과를 복수 전공해야지 좋을까요?' 혹은 '어느 학과로 전과해야 좋을까요?'라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질문을 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이제는 그들에게 '너희가 입학할 때 가졌던 꿈을 잊었냐'고 되물을 수조차 없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문학이 '밥 벌어 먹기 힘든 학문'이며 '취업하기 힘든 학문'이라면 그들을 그 길로 안내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입학하게 될 서른 명의 후배들이 설 자리에는 '인문학의 위기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라는 질문만 덩그라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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