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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기 화백 작품
김인기 화백 작품 ⓒ 김형태
대학 3학년. 초희는 다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4월 초 우리 둘은 대둔산 등반에 나섰다. 대둔산은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이 호남의 만경 평야에 이르기 직전 충남과 전북 사이에 불끈 솟은 암산이다.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릉이 6km 이상 이어지면서 한껏 그 위용을 자랑하는데, 특히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하면서 70m의 높이에 아득히 설치된 일명 구름다리라고 불리는 금강적교는 대둔산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초희는 조심조심 다리를 건너면서 구름다리라는 말이 실감난다고 말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천길 낭떠러지처럼 밑이 아득했다. 다리 중간쯤 왔을 때, 누군가 실수로 등산모를 떨어뜨렸나보다.

그러자 사람이 추락한 줄 알고 모두들 비명을 지르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나는 초등학교 때도 이곳 대둔산을 동네 형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구름다리가 지금처럼 철교가 아니고 쇠줄이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아주 심했다.

그때 아찔아찔하며 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마치 내가 걷고 있는 것이 아니고 쇠줄이 나를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그날의 기억이 새로웠다. 봄철이라 그런지 진달래꽃으로 뒤덮인 능선길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한창 피어오르는 진달래꽃도 꽃이려니와, 힘든 산행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초희의 얼굴도 한떨기 탐스러운 진달래꽃이었다. 아니 진달래꽃보다 몇 곱절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는 금강적교와 진달래꽃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진달래꽃밭에서 남들의 시선을 피해 나는 한마리 나비처럼 그녀의 입술에 살짝 내려앉았다. 그녀와의 다섯번째 입맞춤이었다.

우리는 하산 길에 약 25리 떨어진 양촌 시골집에 들렀다. 나는 부모님과 조부님께 초희를 인사시켰다. 이미 어느 정도는 우리 사이를 알고 계셨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하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물으셨다.

"허초희라, 본관이 어디인고?"

"김해 허가입니다."

초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조부님께서 깜짝 놀라며 말씀하셨다.

"뭐야, 김해 허씨라고? 그러면 우리 집안과 동성동본이 아닌가?"

"무슨 말씀이세요. 동성동본이라니요? 분명히 우리는 김씨고 얘는 허씨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내가 반박하고 나서자, 조부님은 답답하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할아버지의 말씀인즉,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은 허황후를 끔찍이 사랑하여 아들 열 중 두 아들에게 허씨 성(姓)을 갖게 하여 허씨의 명맥을 잇게 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허씨는 우리 집안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동성동본과 같다는 의미였다. 할아버지는 그러니까 서로 사귀는 것까지야 말리지 않겠지만 결혼만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물론 할아버지 말씀에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동성동본으로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은 시대 뒤떨어진 일이라고 여겨졌다. 전에 누나도 사귀는 남자가 있었는데, 같은 김해 김씨라서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깨졌다.

근친상간을 막기 위해 생긴 제도라고 하지만 따지고 들면 모순 투성이었다. 왜냐하면 전에 깨진 누나의 남자친구는 우리와 촌수로 따지자면 거의 백촌 밖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안 된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상식 밖의 법이 어디 있는가? 혹자는 유전을 들먹거린다. 그러나 그렇게 유전을 중요시하는 것이라면 여자쪽 집안도 따져야지. 왜 그쪽은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예를 들어 우리 어머니가 전주 이씨인데 내가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데는 아무 문제나 지장이 없다. 유전과 혈통을 들먹이면서 이 무슨 모순인가 말인가? 이와 같이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성씨를 물려받는 남계(男系) 혈족을 중시한 것으로 남녀평등원칙에도 어긋난다.

"신라왕조가 왜 쇠락의 길로 접어든 줄 아느냐? 왕족 혈통을 계승한다는 거창한 명분 아래 근친결혼을 고집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망한 것이야. 반대로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들이 왜 번창한 줄 아느냐?

그것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왕건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를 원친(遠親)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전통이자 미풍양속인 셈이다. 알겠느냐?"

"할아버님, 죄송하지만 그것은 할아버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동성동본 금혼 제도는 신라나 고려시대 때부터 생긴 우리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접어들면서 중국에 대한 사대, 모화사상에 입각하여, 다시 말씀드리면 유교사상이 들어오면서 확립된 제도입니다.

결코 우리 고유의 전통이나 미풍양속이 아닙니다. 또 유전을 말씀하셨는데, 동성동본의 남녀가 열성유전병 환자인 공통조상을 갖고 있을 경우 그 부부의 자녀에게 똑같은 유전병이 나타날 확률에 관한 우생학적 의견에 관한, 유전학을 전공한 서울대 이정주 교수에 의하면 어떤 줄 아십니까?

유전학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열성유전병이 후대에 다시 나타날 확률은 자매간 혼인은 4명 중 1명, 8촌간에는 125명 중 1명, 14촌간에는 1만6000명 중 1명꼴로 낮아진다는 거예요. 또 16촌간에는 일반적인 유전병의 발생빈도 3만∼5만명 중 1명보다도 낮은 6만5천명 중 1명꼴에 불과해 16촌이 넘어가면 동성동본끼리 혼인하더라도 우생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점이 명명백백하게 과학적으로 드러나 정작 '동성동본 혼인 금지'가 처음으로 시작된 중국에서조차도 이미 폐지된 제도를 우리는 그것이 무슨 신주단지라도 되는 양 받들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형국입니다.

'동성동본 혼인 불허'는 어느 모로 보나 설득력이 없는 분명한 폐습이요, 악습입니다. 이런 구시대적인 폐습과 악습 때문에 초희와 헤어지라고 하시는 건 문자 그대로 어불성설이요 모순입니다. 오히려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사료됩니다. 그러니 할아버님께서도……"

"집어 쳐라. 이 할애비는 무식해서 그런 것 모른다. 네가 어떤 궤변을 늘어놓아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돼! 다시는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늘어 놓지 말거라.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이 얘기하면 무조건 '예, 알겠습니다'하고 순종하는 것이 예의이거늘 어디서 배우지 못한 상놈처럼 이리 무례히 구느냐? 다시 그런 얘기를 하려거든 집안에 발도 들여놓지 말거라. 이 놈!"

나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더 이상의 논쟁을 할 수도 없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9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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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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