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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소금창고 ⓒ 조갑환
도초도의 화도리에도 명동거리가 있다. 상가가 있는 죽 이어진 골목길이다. 우리가 묵었던 여관도 이 명동거리에 있었다. 무슨 골목이 이리도 길까. 골목에 오래 된 집들이 있어 일제 강점기의 서울의 명동거리, 김두한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영화의 세트장을 연상하게 했다.

도초도의 명동거리
도초도의 명동거리 ⓒ 조갑환
밤에 밖에 나왔다. 밖에 나와 배회하는 데 개들이 무척 짖어 댔다. 이쪽에서 짖으면 또 저쪽에서 짖어 대고 서로 화답을 해 데니 바람 부는 도초의 해변거리를 시끄러워서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금. 도초 간 아치형의 연륙교를 걸어서 넘었다. 별로 차도 다니지를 않는다. 난간 쪽에 폭이 좁은 인도를 걸으면서 돌멩이를 주어서 바다에 떨어뜨리며 연륙교의 끝, 비금도까지 걸었다. 불그스레한 가로등이 새색시처럼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외롭다.

다리 아래로는 깊고 깊은 검은 밤바다가 두렵다. 돌을 떨어뜨리면 돌은 보이지 않지 만 조금 있다가 풍덩 소리가 나고 검은 밤바다에 고래의 배처럼 하얀 포말이 일어나는 것이 참 재밌다. 연륙교 끝, 비금도 입구에 웬 포장마차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포장마차가 있다니, 포장마차 안을 밖에서 들여다보니 몇 명의 사람들이 밤 10시가 넘었는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런 섬에서도 포장마차가 있고 술과 낭만이 있었다.

점심 때 식사를 하면서 도초도에 얽인 애기들을 들었다. 도초도는 통일신라 때 당나라와의 중간 기착지였는데 당나라 사람들이 자기나라의 수도 모양이고 목초지가 많아 말을 기르기에 적당하다고 하여 도초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도초에는 지금도 풀과 관련된 이름들이 많다. 숲이 우거졌다는 수림리, 난초가 많다는 고란리 등이다.

도초도에서 동남쪽으로 우이도라는 섬이 있다. 현재 민주당 국회의원인 한화갑 의원의 고향이시다. 명칭은 말 그 데로 소의 귀를 닮았다 하여 부친 이름으로 한 의원도 어려서 가난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고생을 겪었기 때문에 어려운 정치적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의 한 의원이 되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이도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문장가인 최치원 선생이 귀향을 왔다고 했다. 지금도 우이도 상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는 최치원 선생이 바둑을 두었던 바둑판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도초도에 사시는 분들 이야기로는 정약용 선생의 형, 정약전도 흑산도가 아니라 우이도에서 자산어보를 썼다고 하는 데 그 말은 좀 신빙성이 없었다. 얼마 전 TV다큐멘터리에서 흑산도에서 정약전 선생이 귀양살이 하던 흔적을 방영했던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초도에 사시는 분들 말로는 전에 고려 조선시대 때는 도초도, 우이도가 전부 흑산도에 속했던 부속 섬이라는 것이다. 흑산도에 귀양 명이 떨어졌다하더라도 흑산도를 가다가 지치고 너무 멀면 우이도에 내려주고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조정에서는 확인할 길도 없고 백설 공주에 나오는 사냥꾼이 백설 공주를 죽여서 간을 꺼내오라는 왕비의 명을 거역하고 토끼의 간을 꺼내가서 왕비에게는 백설 공주의 간이라고 하였듯이 귀양살이를 수행하던 관원들도 그 냥 우이도에 내려주고 흑산도까지 수행한 것으로 보고를 하였다니 이것이 백설 공주의 사냥꾼 방식이 아니겠는가.

도초도에서의 마지막 밤 24일, 바람이 드셌다. 저녁에 권하는 술 한 잔에 취한 취기를 면해보려고 찬바람을 맞으며 화도리의 어두운 밤거리를 쏘다녔다. 어두움 속에 저 멀리 ‘소금창고’라는 네온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나무판자로 지어진 소금창고에 레스토랑 및 술집을 차려 놓았다. 소금창고 뒤에 해주다방이라는 간판이 보여서 들어갔다.

아가씨 한명만이 앉아있었다. 차를 두잔 시켜서 애기나 하고 싶어서 불렀다.
“자네, 나이가 스물아홉 정도?”
아가씨는 깜짝 놀랐다.
“제가 그리 보여요? 그리 많이 보여요? 스물아홉 살 먹어서 다방아가씨 하고 있으면 인생 막장이게요. 82년생, 스물 셋이예요. 2년만 돈 벌고 딱 그만 둘 거예요”
“돈 벌어서 뭐 하려고 그래”
나는 대개의 아가씨들이 말하던 것처럼 큰 레스토랑의 사장이 될 거라든가 술집을 경영하겠다던가 하는 평범한 말이 나올 줄 알았다.
“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에요. 여자가 그게 행복이잖아요.”
스물 세 살의 아가씨면 어린 나인 데 사회생활을 해서 속이 꽉 찼다.
“ 그럼, 자네 돈 많이 벌었어?”
“못 벌었어요. 지금 까지는 월급으로 소개비 등 빚 갚는 거예요. 빚 갚고 모아야지요. 목포보다는 이곳이 돈 벌기는 좋아요. 목포는 돈 벌기 어려워요. 우선 쓰기가 쉽죠. 그러나 도초는 쓸데가 없으니 자연히 모아질 수밖에 없죠.”

여행지에서 색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만나 그 들만의 꿈과 애로를 듣는 것도 여행이며 재미있다. 매일 걷는 골목 길, 매일 출퇴근하는 도로, 매일 만나는 사람, 이런 익숙한 것들이 아닌 낮선 곳에서 낮선 사람을 만나 나와 다른 길을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들을 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어차피 인생은 여행이며 누구나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만나는 나그네들이 아니겠는가. 나보다 뒤에 오는 젊은 사람들의 애기도 듣고 싶고 나보다 훨씬 앞서서 시간여행을 했던 노인들의 애기도 듣고 싶다.

도초도에서 비금도로 넘어오며 비금도의 염전과 소금창고
도초도에서 비금도로 넘어오며 비금도의 염전과 소금창고 ⓒ 조갑환
25일 섬을 나오는 날, 우리 일행은 오후 네 시 배를 타려고 했었다. 그러나 점심쯤에 태풍주의보가 내려서 배가 오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착잡했다. 오늘 나가려고 계획을 했는데 못나가다니. 섬이란 뭍에 사는 사람이 일주일만 있어도 무척 답답하고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런데 태풍주의보가 내렸다니 갑갑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분에게 어떻게 나갈 도리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비금도의 가산 항에서 화물선이 뜬다고 했다. 오후 세시 배라고 해서 도초도에서 점심을 먹고 비금도의 가산항으로 이동을 했다. 거의 한 시간을 달려서야 비금도의 끝, 가산항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가산항에 오면서 비금도의 끝없이 넓디넓은 염전, 광야에 띄엄띄엄 홀로 서있는 소금창고가 참 인상적이었다. 내가 10여 년 전에 비금도에 왔을 때는 비금과 도초가 연륙되기 전이었고 항구는 도초도의 화도리항구가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다. 비금도와 도초가 연륙이 된 후에 가산항은 개발되었다고 했다.

덧붙이는 글 | 2월 23일부터 25일까지 전남 신안 도초도을 여행하며 개발되지 않은 자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느꼈다. 도초도에는 우리의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있다. 주민들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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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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