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원군 낭성면 고드미 마을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소년기를 보냈던 마을이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단재는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고드미 마을로 들어와서 19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청주에서 고드미 마을로 가는 길은 두 갈래 길이다. 청주에서 미원 방향으로 뻗는 32번 지방도를 타고 가거나 상당산성 고개를 넘어오는 512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이 두 길은 낭성면 관정 1리에서 만나 삼거리를 이룬다. 삼거리에서 왼쪽 미원 쪽으로 300여m 가량 더 가면 왼쪽에 단재 신채호 선생묘소와 고드미 마을까지 2.5km 남았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귀래리는 큰 고드미와 작은 고드미, 세골과 동녘골, 이렇게 4개의 자연부락이 모여 이룬 마을이다. 이 가운데 단재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큰 고드미 마을은 길이 끝나는 산자락 아래 따뜻한 햇볕에 겨워 졸듯이 앉아 있다.
고드미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조선조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요라는 분이 곧은 말로 상소하다가 귀양살이를 하게 됐는데 귀양에서 풀려나자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인조가 반정한 후 여러 번 불렀지만 그는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니 곧으미, 고디미, 고드미 또는 귀래동이라 부르는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뒤에 이 마을이장 박동규(54)씨에게 들은 이야기는 마을의 유래에서 설화적 요소를 제거한 단순한 것이었다. 반듯하게 올라온 길이라 해서 고드미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86주년 3·1절을 하루 앞둔 고드미 마을은 한적했다. 아직 욱리하 냇가에 봄은 오지 않았고 고샅길엔 사람의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고적하기만 하다. 주차장 앞 단재기념관도 문을 열지 않았다. 아마도 월요일은 문을 열지 않나보다. 기념관 옆 계단 옆에 서있는 단재의 시비 '하늘북'을 읽는다.
吾知鼓天鼓者 其能哀而怒矣
哀聲悲怒聲壯 喚二千萬人起
乃毅然決死心 光祖宗復疆土
取盡夷島血來 其흔於我天鼓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하고/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 모아/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단재의 시 <하늘북> 전문 -박정규 역
그는 자신이 하늘북 치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늘북이란 우레소리를 일컫는 말이다. 단재는 하늘북을 치는 사람을 안다고 하지만 하늘북을 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단재 자신이다. 단재는 이 시에서 '섬 오랑캐의 피를 사그리 긁어모아/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고 다짐한다.
조국광복에 대한 그의 의지는 벽력보다 준엄하다. 준엄하다 못해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단재기념관을 뒤로 한 채 바로 옆 언덕받이에 위치한 선생의 사당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위에는 정기문(正氣門)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일찍이 심산 김창숙은 단재의 죽음을 두고 "들으니 군의 뼈를 금주의 불로 태웠다하는데 군이 감에 청구의 정기가 거두어졌구나"라고 애도했다.
靑丘(청구)란 우리나라의 별칭이다. 심산이 "청구의 정기가 거두어졌다"라고 한 말은 이 나라의 정기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아마도 정기문이란 심산의 글에서 나온 게 아닌가 추측한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잔디밭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가면 마침내 단재영각이라 쓰인 사당앞에 선다. 현재 사당이 있는 자리는 단재의 할아버지 신성우가 서당을 열었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이 서당골이라 부르는 곳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을 한 목조건축이다. 이곳에 봉안된 단재의 영정은 1981년 한광일이 그린 가로 70cm 세로 110cm 크기의 전신교의 좌상이다. 단재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르고 고개 숙여 묵념을 올린다.
선생은 중편소설 <꿈하늘>에서 환상적인 한국사 순례를 통해 민족의 자주독립에 눈떠가는 주인공 '한놈'에게 '꽃송이'의 입을 빌어 이렇게 깨우쳐 주신다.
"나란 범위는 시대를 따라 줄고 느나니 가족주의 시대에는 가족이 '나'요 국가주의 시대에는 국가가 '나'이라"
선생의 애국심은 자아를 국가와 동일시하는데까지 확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이 그에게 해준 것은 무엇인가. 중국에서 가지고 온 유골마저 몰래 묻어야할 만큼 조국은 그를 터무니없이 냉대하지 않았던가.
사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작은 문이 나있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선생의 묘가 있던 자리가 나온다. 한용운, 오세창, 신백우 등이 세운 묘표와 1972년에 세운 사적비 그리고 좌우에 버티고 선 문인석 한 쌍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봉분은 사라졌다.
봉분의 붕괴가 잇따르자 며느리 이덕남(61)씨가 바로 오른쪽 언덕 아래 200여m 떨어진 단재의 옛 집터에 가묘를 써서 이장해두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나온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며느리 이씨는 현재 가묘된 자리를 묘자리로 사용키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드미인가 고두미인가
주차장쪽으로 내려오는데 마침 마을 아주머니 두 분이 지나가기에 불러 세웠다. 이번 참에 마을 이름이 고드미인지 고두미인지 정확한 이름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마을 입구 안내판이나 청원군 홈페이지에는 고드미로 나와 있지만 단재기념사업회 홈페이지나 도종환의 시에서는 '고두미마을'로 나와 있어 혼란스럽다. 아주머니들은 "저기 이장온다"라며 오토바이 탄 아저씨를 가리키고는 총총히 가던 길을 가신다.
5대째 이 마을에 살고있다는 이장 박동규(54)씨는 고드미 마을이 맞다고 확인해준다. 그러고보니 마을 앞에 있는 안내판 뒤에 써있는 도종환의 시는 벌써 <고두미마을에서>가 아닌 <고드미마을에서>로 고쳐져 있는 게 아닌가.
박동규씨에 따르면 귀래리 마을은 지금 오리농법 등 친환경농업공동체로 탈바꿈 중이다. 1996년부터 무농약 오리농법으로 친환경농업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마을 50여 가구중 30여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또 작년에는 15가구가 참여해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전통문화체험장을 열었다며 구경시켜 주겠다 한다.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니 멋진 한옥집 다섯채가 있다. 1996년에 건립됐다고 한다. 고샅길을 거슬러 언덕으로 한참 올라가니 거기 흙벽돌로 지은 두 채의 황토집이 나온다.
찜질방도 있고, 천연 물감들이기 시설도 있다. 마당 한 편에선 굴렁쇠들이 한가로이 쉬고 있다. 문을 연 지 얼마되지 않은 탓인지 전통 체험장은 아직은 파리들만이 '누가 누가 잘하나' 재롱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인가 보다.
박동규씨에게 지나가는 말로 예전엔 이 마을에서 무슨 농사를 지어먹고 살았는지 물었더니 고추 농사가 인근에선 알아줄 정도였다고 대답한다. 마을 안내판에는 고드미 장꾼이라면 인근에서 유명했다고 써있다. 오래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나무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 온 모양이다.
그래도 그는 자기네 마을 대동계에서는 1974년 이래 12월 8일 단재의 생일 날이면 단재사당에서 고유제를 지내왔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단재의 성장과 몇 가지 일화들
이곳으로 일곱살 때 이사온 단재는 열살 무렵부터는 한시에도 재능을 보인다. 써레와 쟁기를 지고 일하러 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朝出負而氏 論去地多起(이른 아침에 써래와 쟁기를 지고 들로 나가세. 논을 갈아 나가니 흙덩이가 많이도 일어나네)하고 시를 짓기도 하고 연날리기를 하다가는 이런 깨달음을 얻어 시로 남기기도 한다.
高低風强弱 遠近絲長短
(높게 혹은 낮게 날림은 바람의 세고 약함에 있고/ 멀리 혹은 가까이 날림은 실의 길고 짧음에 있구나)
그렇게 학문의 정도가 점점 깊어가던 무렵 단재에게는 또 하나의 슬픔이 닥쳐왔다. 단재를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던 형 재호가 세상을 뜬 것이다. 단재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었다.
단재는 <가형기일(家兄忌日)>이라는 시에서 그때의 슬픔을 이렇게 말해준다.
先父遣孤吾兩人, 崎卄載閱甘辛.
歸來洞裡三間屋, 郁里河邊一樹春.
風雨 床同話舊, 詩書滿架不憂貧.
誰知今夜燕南客, 獨坐天涯淚滿巾.
아버님 끼친 아들 우리 형제 두 사람
기구한 이십 년에 달고 쓴 맛 다 겪었네
귀래동 마을에는 우리 자란 삼칸 집
옥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피고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니 오늘 밤 이역 만리 길손 되어
하늘가에 홀로 앉아 눈물만 흘릴 줄을
_노산 이은상 역
두 차례 탐방이 남긴 감회
단재의 생가지인 도리미 마을과 성장지인 고드미 마을을 두 차례에 걸쳐 둘러보면서 단재의 유년을 추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그 탐방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고드미나 도리미나 더 이상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 없는 궁벽산촌이었다는 것은 두 마을의 공통점이었다. 그 막혀있음, 그 답답함이 그를 응혼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심취하게 만들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뒤는 막혀 있고 앞으로만 뚫려있는 출구를 가진 마을 풍경이 그의 생애 내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무의식을 심어줘 그를 절대독립론, 무장투쟁론, 민족혁명론(민중직접혁명론) 등의 강경론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지금 왜 단재를 불러내는가
지금 거부할 수 없는 세계화의 물결,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세워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강대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세계질서 속에서 어떻게 민족의 자존과 생존을 지키며 살아남을 것인가가 문제다.
한편에서는 명백한 우리의 역사를 자기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하는 중국의 소위 '동북아 공정'이 진행되고 있고, 시시때때로 터져나오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이 한시도 우리를 긴장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단재가 말한 하늘북을 쳐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원석위의 시 <다시 하늘북을 쳐야할 새벽>이 떠오른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바위를 깎는 칼바람 있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만주벌 뒤덮는 눈보라 있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산맥같은 큰깃발 있지.
그러나
그 바람소리 잦아들어 백성의 혼 잠들어 있고
그 눈보라 그쳤으나 아득한 길 보이지 않고
깃발 흔들어 휘날릴 바람.
어디에서도 불어오지 않는구나.
이제 칼바람 불어 다시 금강을 깎아 빛나게 하려면
만주벌판을 흰백성 눈보라로 뒤덮이게 하려면
큰깃발 준령처럼 세상을 향해 휘달리게 하려면
힘찬 팔뚝으로 하늘을 찢어 새 세기를 열게하려면
온동포 함께 일어나 기쁨의 춤추게 하려면
그를 불러
오늘을 보게하고
그를 불러
동강난 산하를 보게하고
그를 불러
이산으로 상처 깊은 백성들을 보게하고
다시금
그의 하늘북 울려
우리를 깨워야 하는 때.
바로 지금 그 새벽.
*2001년 제6회 단재문화예술제전 헌시*
원석위 시 <다시 하늘북을 쳐야할 새벽> 전문
그렇다. 우리의 혼을 깨워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그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