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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쉴새없이 재잘거리는 여자와 같이 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기분만 생각하는 여자는 더욱 피곤하다. 그녀는 먼저 다점을 벗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담천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그녀는 그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고, 그가 묻지도 않았음에도 스스로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생각만으로 살아 온 여자 같았다. 상대의 감정이나 상대에 대한 배려는 아예 생각도 해보지 않은 여자였다.

그는 그녀를 떼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그를 따라다니겠다고 작정한 그녀를 떼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두들겨 패서 쫓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그녀와 거의 하루를 같이 지낸 양성(陽城)에 도착하기 직전에 끔찍한 일을 목격하면서 손쉽게 해결되었다.

“크---억----!”

단발마의 비명소리였다. 숨이 넘어가기 전의 목소리가 저럴 것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말 안장 위에서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그와 함께 그녀 역시 비명소리 나는 곳을 향해 담천의의 뒤를 따랐다.

장내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십여구의 시체가 나동그라져 있었고, 주위는 마치 폭풍우에 휘말린 듯 땅거죽이 뒤집어지고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사람은 세 명뿐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두 발로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그리고 그 한 명이 땅바닥에 들어 누어 피를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자 애쓰는 도복 차림의 인물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그의 전신은 온통 푸른빛으로 변해 있었다. 입고 있는 청의 때문은 분명 아니었지만 눈과 머리카락은 입고 있는 의복의 색깔과 같았고 특히 그의 양 손은 푸른 광택이 흘러 마치 금속으로 만든 의수(義手) 같았다. 그의 입가에 스며 나온 피나 옷에 얼룩져 있는 선혈의 자국이 아니었다면 청동으로 만든 인간이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유은비(劉殷譬). 너에게 이런 날이 올지 몰랐겠지. 하지만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중원에서 금속과 같이 광택이 흐르는 손을 가진 자는 오직 한 명이었다. ‘푸른 손이 보이면 십리를 도망가라’는 말을 떠돌게 한 청마수(靑魔手) 호광(湖廣)이었다. 그는 우수를 느릿하게 들어 이미 푸른 장인이 두 군데나 찍혀 있는 그의 가슴을 향해 내리쳐 갔다. 종남의 교두(敎頭)라 불리던 창룡신검 유은비는 이미 한 줌의 진기도 남아있지 않는 몸으로 마지막 일검을 쳐 내려하였다. 이왕 죽을 목숨이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때였다. 내리치는 청마수 호광의 전신을 노리고 조그만 물체 세 개가 쏘아왔다. 그 속도와 위력이 경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물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호광은 몸을 비틀어 쌍수를 들어 잡아채 갔다.

“웬 놈이냐!”

쏘아가던 세 개의 물체 중 두 개는 호광이 쳐내는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오직 한 개만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은 만두 하나 조차 사먹을 수 없는 일문짜리 동전이었다.

“어차피 죽어가는 사람을 굳이 죽이려 하는 것은 그리 보기 좋지는 않구려.”

담천의의 신형이 유은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를 본 호광이 언뜻 이채를 띠웠다.

“네놈이었군. 그렇지 않아도 한 번쯤 만나고 싶었지.”

그의 얼굴에 다시 미세한 살기가 피어 올랐다. 관왕묘에서 섭장천의 제지로 손을 쓰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린 듯 싶었다. 하지만 담천의는 씁쓸한 미소를 띠우며 장내를 훑어 보았다.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십여구의 시신조차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 없었고, 피비린내가 코를 마비시킬 정도였다.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지 않소?”

종남의 인물들로 보이는 시신 일곱구와 내력을 알 수 없는 인물 두명, 그리고 뜻밖에도 낭씨쌍쌀 형제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반장 떨어진 곳에는 청마수와 함께 다니던 흑마조(黑魔爪) 형가위(邢苛尉)가 전신에 피칠을 한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노부가 심했다는 것이냐? 아니면 무작정 공격해 온 저 자들이 심했다는 것이냐?”

청마수 호광의 살기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나타난 담천의를 죽이겠다고 작정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곳의 일을 외부인이 알아서는 안 되었다. 이미 시신이 되어버린 종남칠수(終南七秀)와 아직 실날같은 숨이 붙어있는 유은비의 시신이 나중에 발견되더라도 그 일을 벌인 인물이 자신들이었음이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더구나 자신의 일행 중 유은비의 검에 맞고 죽은 종오(終五)와 점육(點六)의 시신은 절대 외부로 노출되면 안 되었다.

“당연히 귀하의 행위를 나무라는 것이오. 아무리 무림인이라지만 그냥 두어도 죽을 사람에게 손을 쓰는 것은 도리가 아니오.”

“흐흐… 성인군자(聖人君子) 같은 소리만 골라 하는구나. 무림이란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이다. 노부가 그 보다 약했다면 죽는 것은 노부였을 것이다. 그래도 네 놈 입에서 유은비에게 그리 말했을까?”

그때였다. 담천의의 뒤를 따라 온 조양궁의 소궁주 진진이 장내에 모습을 보이더니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악!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그녀는 급히 시신이 널부러진 참혹한 장내에서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그녀로서는 이런 광경을 거의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아직도 시신에서는 피가 밀려 나오는 광경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그녀의 출현에 청마수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나직한 탄식을 터트렸다.

“소궁주는 어디를 다녀 오시는 길이오?”

청마수 호광의 말은 질책에 가까웠다. 그런 그의 태도에 진진은 당황했다. 저 사람은 저런 식으로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을 몰래 도망쳐 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저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장내를 둘러 보았다. 혹시나 할아버지가 있을까 해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도 답답해서 나온 것 뿐이에요.”

그녀는 본래 가진 천성을 버리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없음을 알자 그녀는 그런 일을 왜 묻느냐는 투였다. 청마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는 소궁주로 인하여 많은 희생을 치렀소. 소궁주가 사라지는 바람에 우리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고, 이들의 추적을 받게 되어 우리의 형제를 잃게 된 거요.”

그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수차례에 걸쳐 주의를 주었다. 아무리 자신을 귀여워 해 주시는 할아버지지만 이런 결과를 초래한 자신은 큰 벌을 받을 게 뻔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조양궁으로 돌려 보내는 일이었고,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이제 중원을 나오지 못하게 할 터였다.

“나, 난 그저… 누가 나를 기다리라고… 했나요.”

그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호광이 또 다시 탄식을 했다. 저 철없는 아가씨를 나무란들 뭐하랴. 그저 제멋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지껄이는 저 철부지는 이런 일이 나중에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 철부지는 그들과 같이 행동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졌던 외할아버지가 조양궁에 모습을 보였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보고 싶었던 중원에 나온 것뿐이었다.

그녀와 관계가 있는 건 오직 섭장천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섭장천의 손녀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녀를 나무라거나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섭장천은 그들에게 있어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고 진정으로 굴복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호광이 진진에게 신경을 쓰는 동안 담천의는 유은비를 안아 출혈이 되는 몇 곳을 지혈시켰다. 그 행동은 아주 자연스러워 호광을 무시하는 것인지 의식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유은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였군. 나타났구먼. 병주고 약주는 것인가? 그만두게. 이미 내장이 상해서 노부는 살 수 없네.”

유은비로서는 담천의와 좋은 만남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자는 초혼령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초혼령과 관계된 작자들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찾았다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목숨을 잃은 것은 자신과 종남의 제자들이었다.

화심검 화웅을 기다려 같이 움직였어야 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이들을 추적해 공격한 것은 너무 성급한 행동이었다. 자신과 종남칠수가 겨우 다섯 명뿐인 이들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자네의 수하들은 정말 무섭군. 하지만 죽기 전에 반드시 물어 볼 말이 있네. 그 의문을 가지고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말이야.”

유은비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들이 자신의 수하라니…? 하지만 이미 죽어가고 있는 유은비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유은비를 보며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오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후배는 저 자와 얼마 전에 한 번 만난 악연이 있소. 아마 후배와 유 선배와의 만남과 비슷했다고 하면 맞을 거요.”

그 말에 유은비는 담천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마 그의 말이 진심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악연이라면 처음 만났을 때 담천의가 말한 바 있었던 초혼령을 빼앗으려 했던 자들이 이들이었다는 말이었다.

“쿨--럭--, 이들은 장안의 양만화를 도우러 가던 본파의 제자들을 살해한 자들이야. 또한 양만화에게 떨어진 초혼령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고….”

오해는 바로 초혼령이었다. 담천의가 초혼령을 가지고 있고, 유은비와 화웅이 집요하게 추적하여 온 이들은 양만화에게 떨어진 초혼령의 행사를 도운 자들이다. 그렇다면 담천의가 이곳에 나타남으로 해서 초혼령주가 아닌가 하는 그간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준 것이다. 담천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본인은 이들과 전혀 관계가 없소. 더구나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간교를 떨 만큼 두꺼운 얼굴을 가지지도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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