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평화네트워크라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정욱식이라고 합니다.
지난 6년간 평화운동을 해온 저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을 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이 일에 소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김 위원장께서 택하고 있는 대미 전략에 큰 결함이 있다는 말씀을 저는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북측이 취해온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북이 오판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선반도의 핵문제"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산물이고, 최소한 북측의 핵 포기가 미국의 적대정책 철회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북측의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출범 전부터 공화당 진영, 특히 네오콘의 대북정책을 나름대로 관찰해온 결과 지금과 같은 북의 대미 전략으로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측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있지도 않은 대량 살상무기 정보를 왜곡하면서 이라크 침공을 강행했습니다. 또한 유럽연합과 이란 사이의 핵 협상이 진전을 이루자 이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면서 이란의 인권, 정치체제를 집중적으로 문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북에 대해서도 최근 인권과 정치체제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면서 생화학무기, 미사일, 재래식 군사력, 경제 문제 등이 전반적으로 해결되기 이전에 관계 정상화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핵문제'를 빌미로 삼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국가들의 정권을 축출하는데 본질적인 의도가 있다는 의구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저는 북측이 최근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또 조건부이긴 합니다만 6자회담 불참 입장을 밝힌 것은 이와 같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내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은 양면 전략을 취해왔습니다. '핵 시위'를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를 압박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협상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대미 억제력의 확보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두 가지 전략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북의 핵무장'과 부시 행정부의 득실관계
먼저 핵 시위의 강화가 협상용으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부시 행정부가 북의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북의 핵무장은 미국이 주도해온 핵비확산체제에 파열음을 내는 것으로 분명 미국에게도 심각한 도전이자 외교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또한 클린턴 행정부 때의 사례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다릅니다. 북의 핵무장에 따른 부정적인 여파를 통제할 수 있다면, 당분간 '악의적인 무시'로 일관하면서 북의 핵무장을 군사 패권주의를 강화하는데 활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듯이 부시 행정부는 미사일방어체제(MD) 등 군사패권주의를 추구하는데 '북위협론'을 최대 구실로 활용해왔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정치적 탈출구를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북이 1990년대 초반에 이미 1∼2개의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며 비판의 예봉을 피해왔던 것입니다. 또한 6자회담을 통해 외교적인 해결을 시도해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미국이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부각시켜왔습니다. 즉, 부시 행정부는 북의 핵무장 책임을 클린턴 행정부와 북에 전가시킴으로써 책임 회피를 해온 것입니다.
또한 부시 진영은 북이 핵무장을 하더라도 그 파장을 줄일 수 있다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판단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북이 핵 물질과 기술을 외부로 이전하는 것을 '금지선'(red line)으로 설정해 이를 봉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론을 억제할 수 있다면 부시 행정부로서는 실보다 득이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북의 핵무장에 따라 한국과 일본 내에서 제기될 수 있는 핵무장론은 핵우산을 포함한 안보공약의 강화를 통해 '당분간' 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거꾸로 한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높임으로써 21세기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해온 동맹의 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북의 핵무장은 최근 차질을 빚고 있는 최첨단 무기체계 개발 및 보유에 더없이 좋은 명분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른바 "깡패국가"들에게는 억제력이 통하지 않는다며 선제공격을 공식 채택한 상황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MD 구축 및 지하시설 파괴용 소형 핵탄두 개발을 추진해왔습니다.
그러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요격용 지상배치 MD는 작년 12월과 올해 2월 잇따른 실험 실패로 위기를 맞고 있고, 소형 핵탄두 개발 예산은 미국 의회가 전액 삭감했습니다. 북의 핵무장은 이와 같이 위기에 처한 무기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요인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부시 행정부는 북의 핵무장을 북의 붕괴나 정권교체를 유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할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부시 행정부 내부에는 북과의 평화공존보다는 "할 수 있다면 북을 붕괴시키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북의 핵무장은 "기회가 왔다"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핵 억제력'으로 안전해질 수 없어
이처럼 핵 시위를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부시 행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 담판을 짓는데 효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핵 비확산을 최우선적인 외교정책으로 삼은 바 있는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는 근본적으로 '위협'을 필요로 하는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부시 행정부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북이 공언해온 것처럼 "핵 억제력"을 포함한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으로 부시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방법은 북이 함정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부시 행정부는 북의 핵 시위 강화에 대해서는 '악의적인 무시'를 하면서 이를 구실로 삼아 중장기적으로 북을 붕괴시킬 수 있는 군사적·비군사적 수단을 차곡차곡 준비해나갈 것입니다.
우선 당분간 부시 행정부는 "북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선제공격 전략을 문제 삼으면서 "핵 억제력" 강화를 공언하고 있는 북의 주장에 김 빼기를 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대북 억제력" 강화를 명분으로 한반도 안팎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수시로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북의 군사력 소진과 내부 동요를 유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6자회담의 복귀를 촉구하면서 회담에 복귀하지 않는 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상황 악화의 책임을 북에 돌리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북의 인권문제를 지속적으로 문제삼으면서 대북적대정책을 정당화시키고 인권법 등을 통해 대량 탈북을 계속 유도할 것입니다.
부시 행정부가 앞으로 북의 경제적 취약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북의 외화수입원을 차단한다는 목표 하에 다양한 제재와 봉쇄 수단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미 제재에 돌입한 일본에 이어 남한과 중국 등도 대북 제재 노선에 동참시키기 위해 압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북의 핵무장은 미국이 북의 경제적 취약성을 공격하는데 고삐를 당겨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정일 위원장께서는 핵무장을 통해 북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더라도 군사적 억제력 확보에는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대하기 힘든 현실입니다.
핵무기 보유가 실질적인 대미 억제력을 갖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핵무기를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소형 핵탄두 제조 기술의 확보 ▲상대방의 선제공격으로 핵무기가 파괴되어도 보복공격을 할 수 있는 '여분의' 핵무기 확보 ▲상대방의 선제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보 즉시 발사' 태세 확보 ▲상대방의 동향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정보력의 확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과 첨단 기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요구됩니다. 또한 북은 영토가 작기 때문에 핵무기의 분산 배치가 어렵고, 지하시설 깊숙이 은폐시킬 경우 신속한 대응 공격이 어려워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마땅한 대미 억제력이 없는, 특히 주한미군 재배치로 북의 야포 전력이 무력화될 상황에 처한 북은 일단 '몇 개'라도 핵무기를 보유하면 미국의 선제공격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핵군비경쟁의 본질을 볼 때 이는 결코 현실적인 인식이 아닙니다.
군사적으로 적대 국가인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한-미-일 삼각체제는 북한의 핵무기고(庫)를 최우선적인 파괴 대상으로 삼을 것이고, 이에 불안을 느낀 북은 핵무기와 미사일의 양을 늘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북이 스스로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의 핵무기 보유는 핵무장 자체가 갖고 있는 안보 딜레마의 속성과 북한의 경제력 및 기술력, 그리고 한-미-일의 군사력을 종합해볼 때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군비경쟁의 늪에 빠지면 그 결과는 자명해질 것입니다. 미국에 의해서든 북에 의해서든 한반도는 끊임없는 전쟁의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북은 첨예한 군비경쟁과 경제난의 '악순환' 속에서 체제 붕괴의 위험성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스타워즈'를 통해 소련을 붕괴시켰다고 믿고 있는 미국 매파들의 노림수도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이제 북은 '악순환의 늪'에 더 깊숙이 빠져들기 전에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몫은 바로 김 위원장께 있을 것입니다.
편지가 길어져서 못 다한 말씀은 다음 편지에서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간만 다시 편지를 띄우겠습니다.
2005년 3월 7일
정욱식 드림
덧붙이는 글 | [공개편지-2] '6자회담에 나와서 당당하게 말씀하십시오'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