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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화순 북면 방리 양지마을에서 바라본 백아산. 움뿍 패인 곳 아래가 마당바위입니다. 우리 마을은 경지정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그 가치가 발휘될 모양입니다.
우리 마을 화순 북면 방리 양지마을에서 바라본 백아산. 움뿍 패인 곳 아래가 마당바위입니다. 우리 마을은 경지정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그 가치가 발휘될 모양입니다. ⓒ 김규환
탄광지대, 평야, 산골이 혼재한 화순의 사뭇 다른 풍경

전라남도 정중앙은 화순군 능주면이다. 서쪽인 나주시와 인접한 능주와 도곡면, 화순읍 쪽은 평야지대에 가깝다.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이 즐비하고 도암면에 가면 운주사가 우리를 반긴다. 천불천탑의 신비가 깃들어 있는 운주사에서 그윽한 산사의 기운을 느끼고 화순 관내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동북쪽으로 향한다.

이양, 청풍, 춘양, 한천이 또 하나의 지역으로 화순에서도 버림받는 골짜기에 700, 800m대 산에 안겨서 시절을 잊고 더 촌구석화 되고 있는 구역은 장흥이나 보성쪽에 가깝다. 화순읍은 여느 수도권 신도시 못지않게 도시화가 진행되어 유일하게 전라남도에서 인구가 늘어가는 시군이라는 아이러니한 곳이지만 이제 화순읍, 동면을 거치면 색다른 풍경에 또 놀란다.

강원도 태백, 정선엔 미치지 못하지만 한때 우리나라 서남권에서 유일하기도 했고 무연탄 매장량이 만만치 않았던 화순탄광지대라 자연전체가 까맣다. 산과 나무, 바위와 집이 모두 시커멓다. 남부지방에서 탄광촌이 형성이 되어 일제시대엔 원산총파업 다음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운주사 석불. 집에서 운주사까지는 80 가까이 됩니다. 작년에야 다녀 왔답니다.
운주사 석불. 집에서 운주사까지는 80 가까이 됩니다. 작년에야 다녀 왔답니다. ⓒ 김규환
1950년 그들과 백아산 빨치산이 합류하여 광주시를 접수하여 3일 천하를 호령하기도 했다. 차창밖엔 연탄공장이 즐비하다. 아직도 막장에서 퍼올린 연탄조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탄을 실어 나르던 열차를 심심찮게 본다. 처음 지나는 사람들이 이곳을 보고 있노라면 강원도 탄광지대의 쓸쓸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게다.

사람들은 화순군은 광주와 닿아있고 전라남도 한가운데에 있어 평야지대거나 그냥 평범한 군으로 인식하기 쉽다. 벌써 여기만 훑어보아도 이미 일반 시군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큰 도로가 화순군을 비켜가기 때문에 화순군은 가운데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

동북쪽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장성, 광주를 거쳐 담양, 곡성, 순천, 광양이나 여수 등 동남쪽으로 빠지고 국도 1호선과 철도는 나주, 함평, 무안, 목포 등 서남부 지대를 거쳐 영암, 장흥, 보성, 해남, 강진, 고흥으로 빠진다.

88고속도로는 담양을 거쳐 전북 순창으로 빠지고 서해안고속도로는 전라북도와 연결을 편리하게 하여 영광, 함평을 따라 곧바로 목포로 연결된다. 이러니 화순은 2차선 국도만 몇 개 지나가므로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예전 시골 분위기 그대로다. 광주에서 무등산을 바라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바로 그 민둥산 뒤쪽이 화순군이다. 무등에 가린 건가 화순을 덮어 버린듯하다.

화순에는 적벽이 2개 있는데 예전 한산사가 있던 화순적벽(이서적벽)에서 김삿갓이 생을 마감했는데 이곳은 수몰이 되어 지금은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렸습니다. 더 위쪽으로 올라오면 물염적벽이 있습니다.
화순에는 적벽이 2개 있는데 예전 한산사가 있던 화순적벽(이서적벽)에서 김삿갓이 생을 마감했는데 이곳은 수몰이 되어 지금은 소중한 자산을 잃어버렸습니다. 더 위쪽으로 올라오면 물염적벽이 있습니다. ⓒ 화순군
멀고 험한 내 고향 백아산 가는 길

탄광지대를 지나면 화순현감 자제로 글공부를 하던 다산 정약용 형제들이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이 말년을 보내던 남한 최고의 절경 화순적벽이 묻힌 동복천 일대를 지나면 내 어린 시절 왁자지껄한 꿈을 선사했던 시장판이 열리던 이서면 방석굴장이다. 동복댐에 수몰되어 낱낱이 사라진 기억의 밑바닥이다.

마의 묘치재를 넘거나 실제 존재하지 않는 사평역으로 착각하는 남면 사평리를 지나면 오지호 화백의 정신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탄광 끝자락을 지나쳐 오른쪽에 모후산을 두고 동복면을 지난다. 담양 식영정과 환벽당, 소쇄원을 둘러보고 큰 고개를 넘고 동복 가수리를 지나 또 한번 넘거나 곡성군 오산면에서 선세재를 넘으면 화순군 북면에 이른다.

아! 이제야 내 고향에 도착했구나. 넘는 곳마다 재요, 산이니 사람들이 이곳을 지척에 두고도 몰라보는 게 당연하지. 지나치기 십상인 것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주인이 매번 바뀌는 백아산 마당바위 묘지(현재는 박씨로 되어 있다.)에서 바라본 지리산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중간에 섬진강을 건너다가 많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주인이 매번 바뀌는 백아산 마당바위 묘지(현재는 박씨로 되어 있다.)에서 바라본 지리산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중간에 섬진강을 건너다가 많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 김규환
곳곳에 노출된 석회암은 하얗다. 날개를 쫙 펼치고 비상을 꿈꾸는 한 마리의 큰 거위가 길게 뻗어 있다. 백아산(白鵝山)! 내 힘의 원천이요, 내 삶의 뿌리이며 내 피와 뼈에 오롯이 전해져 즐겁고 힘겨운 나날을 물려준 백아산(810m). 현대사에서 이곳만큼 질곡이 오래 이어진 곳도 없을 것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후반부는 백아산 이야기이고, 정지아(鄭智鵝)의 <빨치산의 딸> 전 3권은 '백아산의 메아리'가 쟁쟁하게 울려 퍼져 서남권 공비토벌을 위해 미8함대가 오키나와를 출발하던 생(生)과 사(死)가 교차하던 현장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악과 선, 밤과 낮이 공존하던 소굴이었다.

높이와 규모로 보아 관악산(629m)이나 인수봉이 있는 삼각산(836m. 북한산은 일제시대에 지어진 이름으로 이젠 본래 이름인 삼각산이라 불러 줄 때가 되었다.)이지만 3,500명의 버림받은 최후의 전사(戰士) 빨치산은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모후산, 추월산, 회문산, 덕유산을 접고 그들에겐 야산이나 다름없는 백아산 골짜기로 몰려들었다.

왜일까? 왜 내 아름다운 고향, 백아산으로 몰려들어 산천초목 병들게 하고 사람들 마음에 멍이 들게 한 것일까? 하고 많은 곳 놔두고 그 험난한 역사를 쓰게 한 것인가.

백아산 바로 앞에 무등산 뒷자락이 한꺼번에 펼쳐져 있습니다. 뒷면을 전체 보려면 백아산에 올라야 합니다.
백아산 바로 앞에 무등산 뒷자락이 한꺼번에 펼쳐져 있습니다. 뒷면을 전체 보려면 백아산에 올라야 합니다. ⓒ 김규환
백아산 마당바위 요새에 대한 재해석

지리산은 산은 크지만 식량 확보를 위한 '보급투쟁'이 용이치 않고 지형상 서쪽에서나 동쪽 어느 방향에서든 토벌대에겐 기어오르기만 하면 진지를 확보하는데 별 저지선이 없었다. 언제고 몰살당할 위험에 노출되었고 혹한기에는 추위에 견딜만한 기력이 없었다. 여타 지역은 빨치산 간 고립을 면치 못하여 분산될 소지가 있었다.

백아산은 이런 여러 가지 악조건을 극복할 대안이었다. 동북쪽으론 섬진강(贍賑江)이요, 화순군 일대 전남 중앙부를 관통하는 동복호와 주암호로 빨려 들어가 광주 전남 주민의 식수를 공급하는 보성강(寶城江)의 발원지로 나뉘는 분기점이다.

백아산에서 지리산까지 하룻밤에 부상자를 들춰 메고 달릴 수 있다. 주위에서 피아간(彼我間) 교전이 벌어지면 한걸음으로 도착할 수 있다. 마지노선으로 최후의 보루를 내주고 도피할 루트가 곳곳으로 이어진다. 섬진강 건너는 걸 제외하고는 아지트가 될만한 조건이 충분해 이곳이 산악게릴라전의 요새(要塞)로 된 첫째 이유이다. 백아산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은 해발 350m 이상의 고지를 넘어야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뿐인가. 일단 화순북면으로 들어오기도 겁이 나지만 이 지역으로 어찌어찌 왔다고 해도 머무를 만한 곳이 없다. 길목에서 보이는 족족 들이 갈기면 수도 없이 나가떨어지니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들다. 그러니 대대적 공세와 미군 측의 도움까지 받아 총공세를 펼치고도 누차 물러갔던 요인이기도 하다.

눈 쌓인 백아산에서도 겨울을 나기가 힘듭니다. 5월 초까지 눈이 내니는데 예나 지금이나 눈은 많이 온답니다.
눈 쌓인 백아산에서도 겨울을 나기가 힘듭니다. 5월 초까지 눈이 내니는데 예나 지금이나 눈은 많이 온답니다. ⓒ 김규환
여기에 백아산 마당바위(754m)라는 천연요새에 오르면 수성(守城)하는 처지에선 이보다 기가 막힌 형국이 없지만 빼앗기 위해서는 전부를 내줘도 부족할 수도 있다. 바위산이라 치고 오를 능선과 계곡도 만만치 않지만 근접했다고 해도 차일봉(590m)에서 보낸 신호를 보고 미리 입구에 화력을 총집중하면 귀신도 오르기 힘든 암벽 위에 널찍한 바위가 있다.

천연잔디가 깔려있어 2, 3천명이 춤추고 놀 수 있고 발동기를 끌고 올라가 방아를 찧었던 깎아지른 암벽 경사 위에 운동장이 펼쳐져 있으니 고지를 탈환하고 내주지 않으려고 국군과 빨치산의 명운을 걸고도 남을 가치가 있다. 바로 앞엔 무등산 뒤 꼭지가 쭉 펼쳐져 있다.

마당바위 바로 아래엔 용솟음치는 샘물이 사철 끊이지 않는다. 그 아래로 5월이면 고산철쭉 군락이 이념(理念)의 잣대로 갈라 피비린내를 풍기며 그 당시를 위로하고 있다. 보드랍던 백의민족의 흰 옷에 선명한 선혈이 낭자된 것일까. 그 시절을 잊지 말라고 누군가가 몰래 아픔을 뿌려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군대에선 사람목숨보다 중요한 게 총과 총알이다. 그런데 남북 양쪽으로부터 고립된 지역에서 자신들을 지켜낼 무기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배후도시엔 광주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었고 여기에 한 때 광주를 같이 점령했던 화순탄광에 화약고가 있었던 점도 주목할만 하다.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연 최대의 무기인 대나무가 지천이었던 것도 탄환을 절약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진달래와 크림슨색 철쭉이 아닌 보드라운 색감의 고산철쭉이 백아산 마당바위 바로 아래쪽에 5월 초가 되면 흐드러지게 핍니다. 위령제도 그 때 해마다 열립니다.
진달래와 크림슨색 철쭉이 아닌 보드라운 색감의 고산철쭉이 백아산 마당바위 바로 아래쪽에 5월 초가 되면 흐드러지게 핍니다. 위령제도 그 때 해마다 열립니다. ⓒ 김규환
백아산 일대에서 현재 휴양림이 있는 갈경이 노치리 계곡과 우리 마을 쪽인 송단, 방리 방면 깊숙한 계곡에 들면 외부 세계와 단절을 경험한다. 두 곳은 밤과 낮에 따라 인공기와 태극기가 바뀌고 마을마다 동네 건너편으로 대나무를 베어 이중 울타리를 치고 청년들이 돌아가며 지키며 상황에 따라 깃발을 달리 내걸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길들여진 민간인에게 인심을 잃지 않는 건 전투 식량 확보, 보급투쟁의 유리한 1차 조건이다. 덧붙여 담양, 곡성, 화순 일대 자잘한 산골 마을을 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리라. 그들의 인정과 보투 과정에서 빚어지는 자잘한 다툼에 은신처가 곳곳에 숨어 있으니 노출되지 않고도 최소한의 먹을거리는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방향 감각과 길을 잃고 기력이 떨어졌다면 그 참담한 심정을 산에 다녀본 사람들은 안다. 마땅히 쉴만한 곳도 없을뿐더러 가져갔던 요깃거리마저 떨어져 간다. 마실 물도 찾기 힘들다. 암담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당황부터 하게 되는데 이때 무엇으로 그 상황을 모면할 것인가?

당시 ‘산사람’들은 칡뿌리도 캐야하고 칡넝쿨, 칡꽃을 따먹는다. 진달래와 독이 있는 철쭉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청미래넝쿨 열매, 찔레 싹 찔구, 마, 삐비, 띠뿌리, 똘배, 똘감, 팥배고욤, 머루, 다래, 으름에 생전 먹어보지 못한 쥐똥나무 열매도 따먹는다.

삽주(창출), 더덕, 딱주(잔대), 백하수오, 메꽃뿌리 뿐 아니라 독초뿌리도 씹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가히 가재나 징게미, 메기, 산천어를 잡아 매운탕 끓일 수도 없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는 풀뿌리와 나무껍질의 효용을 알아야 했다. 눈여겨 봐둬야 했다. 지혈제와 더위를 물리는 식물, 추위를 견디게 하는 자체 상비약은 산에서 구해야 했으니 다들 식물학 박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취나물, 돗나물, 엉겅퀴, 다래잎, 홑잎, 떡취, 곤달비, 곰취, 미나리까지 나물류를 통달하면 어엿한 산사람이 되어 턱수염 덥수룩하여 영락없는 귀신 몰골이다. 나방과 벌레를 잡아먹어야 했던 사람들이 노루, 고라니, 멧돼지, 토끼, 산비둘기, 참새, 뱀 따위의 산짐승을 가만두었을까 보냐.

소쇄원엔 매화가 한창이겠네요. 산수유도 멋집니다. 산채원을 만들면 자연 그대로 활용할 생각이랍니다.
소쇄원엔 매화가 한창이겠네요. 산수유도 멋집니다. 산채원을 만들면 자연 그대로 활용할 생각이랍니다. ⓒ 김규환
단절의 골짜기, 백아산에 산채원 둥지를 틀어야할 이유

이게 백아산에는 모두 있었다. 해발 300m 대가 평지다보니 들엔 나물로 그득했다. 700~800m대 산엔 야생동물이 뛰놀고 있었다. 때론 외로움을 달래주는 동무였지만 굶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지리산 등 백두대간 본 줄기에 벗어나 있지만 없는 것 없이 생물종의 다양성에선 약초와 더불어 빠짐이 없는 깊숙한 곳이다. 산삼이라고 없을까?

이런 자원의 보고가 내 고향 백아산이다. 산채원의 적지이다. 서늘하여 중부지방 사람들이 산나물을 찾을 때에 맞춰 싹이 피어나므로 시기도 같다. 서늘한 기후는 무엇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칠 명분을 주지 않는다는 점도 부각되어야 한다. 상수원 최상류에서 유기농을 실천하면 그것이 바로 환경운동이며 사람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최소한의 개발로 우리 산천을 지키기에도 적합하다.

긍정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노력은 예서 멈출 수 없다. 적재적소 식재 원칙에도 부합하여 가만히 놔둬도 잘 자란다. 덧붙여 내가 나고 자란 곳이라 토질과 기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자연에 순응하며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할 여지도 많다.

백아산은 전후 세대인 나에겐 이제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잘잘못을 따지기에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 기회에 홍어 한 접시 차려 양쪽 넋을 위로하지 않는다면 영영 화해할 시기를 놓칠지도 모른다.

엄연히 사실로서 존재했던 역사가 묻힐 위험도 있다. 우리 역사였던 것을 이젠 아우르고 보듬어야 하지 않을까.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책무이기도 하다. 험난했던 역사는 늘 우리 곁에 살아 있다. 양쪽을 위로하는 산막 하나 만들어 교훈으로 삼는다면 좋겠다.

홍어 하나 먹는데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먹고 놀자는 모임이 아니며 요즘엔 취미와 기호에 따라 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자잘한 동호회와 공통 관심사로 한 데 어울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백아산에서 먹는 의미는 또 다를 겁니다.
홍어 하나 먹는데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먹고 놀자는 모임이 아니며 요즘엔 취미와 기호에 따라 분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자잘한 동호회와 공통 관심사로 한 데 어울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백아산에서 먹는 의미는 또 다를 겁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나물 백화점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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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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