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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기행문집 <선방 가는 길> 표지
정찬주 기행문집 <선방 가는 길> 표지 ⓒ 열림원
바둑을 좋아하는 나는 인터넷 바둑을 두는 일이 많다. 그런데 상대방이 인터넷 환경이 가진 몇몇 특성을 이용하여 기도(棋道)에서 벗어난 꾀를 써서 역전승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당연히 불계패해야 할 상황인데도 한정 없이 시간 끌기 작전에 들어가 지치게 만들어 놓은 다음 꼼수를 쓰거나 계가에 제대로 응해 주지 않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이 무슨 인생의 중대사도 아니니 웃고 넘겨 버리면 그만일 것을, 기분이 나빠진 나는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공격에만 열중하다 보니 오히려 패배만 거듭한다.

'오늘은 바둑이 잘 안 되네'하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오로지 몇 판을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마음뿐이니, 이렇게 해서는 다른 일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바둑이 아무리 좋은 놀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인터넷 오락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언젠가 책을 좋아하는 한 지인(知人)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저 녀석은 피시(PC) 앞에만 앉으면 밤낮 오락입니다. 책읽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작가님이 한말씀 좀 들려 주십시오"하고 지인이 말했다. 그때 나는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사람이 글을 만든 것인데, 책을 읽지 않고 오락만 한다면 그건 글 모르는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들려주었는데 그런 내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부끄러울 뿐이다.

직업 바둑인이 아니면서도 꼭 이기려고 하는 이 우스꽝스런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여러 궁리를 하던 끝에 책 한권을 펼쳐 들었다.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만해 한용운의 전기를 다룬 장편소설 <만행> 등의 불교문학으로 일가를 이룬 소설가 정찬주의 기행문집 <선방(禪房) 가는 길>.

청산이 바삐 움직이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치열한 구도 현장을 찾아다니며 발로 쓴 '나를 찾는 선방 기행', 2부는 선의 원류를 찾아 사색하는 '선을 찾는 시간 여행'.

현재 남도 산중에 '이불재'라는 산방을 짓고 농사일과 집필에 전념하고 있는 소설가 정찬주. 그런데 그 호젓한 산중에서도 집착은 떨쳐 버리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집착의 무서움에 대해서 '비록 몸은 청산에 있으나 마음은 저잣거리로 나가 이런저런 욕심에 끌려다니고 만다'고 '작가의 말'에 털어놓았다. 그래서 방 벽에 초의 스님의 시에서 읽은 '청산응소백운망(靑山應笑白雲忙)'이라는 구절을 적어 놓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청산이 바삐 움직이는 흰 구름을 보고 비웃는다'는 뜻이다.

깊은 산중에 머물고 있는 저자가 또다른 깊은 산중의 유서 깊은 선방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속세를 향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부지런한 사색의 몸짓이었을까? 그는 '허상의 나를 버리기 위한 나만의 떠남'이라고 했다. 금족(禁足)의 공간을 찾아들고픈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수행하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대화하면서 내가 누구이며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싶었다고 했다.

최근 2~3년 사이에 입적하신 해인총림의 혜암 방장스님, 봉암사 태고선원의 서암 조실스님, 성륜사 청화 조실스님, 백양사 고불총림의 서옹 방장스님을 생전에 다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깨달음을 향해 가는 소설가 정찬주의 부지런함과 오랜 세월 쌓아온 인덕(仁德)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느 한 문장 한 문단 빼놓고 읽을 수 없도록 저자의 걸음걸음마다 사색의 깊이가 느껴지는 <선방 가는 길>. 세상 비판하는 글을 자주 쓰기 때문일까, 누군가가 나를 구설(口舌)하는 듯한 환청(幻聽)에 자주 집착 당하는 내가 이 책에서 비로소 발견한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가르침은 바로, 아래 인용한 서옹 스님의 말씀이었다.

서옹 스님에게 저자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해. 부모가 부모임을 알고 자식이 자식임을 알고 스승과 제자, 정치인과 국민이 그러하다면 무슨 깨달음이 필요하겠어? 자기가 누구인 줄 알고 자기 할 일을 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를 찾는 보살도요, 남을 돕는 이타행이지. 문제는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본분을 저버리는 데 있을 뿐이야." - <선방 가는 길> 47쪽에서

100년 넘기기가 기적인 인생살이에서 취미로 두는 바둑 한판에조차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승리의 욕심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내가 꼭 써야 하는 데 보내야 할 시간을 얼마나 많이 분실하며 살고 있었던가!

덧붙이는 글 | <선방 가는 길> 정찬주 씀/2004년 9월 3일 열림원 펴냄/반양장 223×152mm(A5신)/올컬러 336쪽/값 1만1000원

●김선영 기자는 대하소설 <애니깽>과 <소설 역도산>, 생명 에세이집 <사람과 개가 있는 풍경> 등을 쓴 중견소설가이자 문화평론가이며, <오마이뉴스> '책동네' 섹션에 '시인과의 사색', '내가 만난 소설가'를 이어쓰거나 서평을 주로 쓰고 있다. "독서는 국력!"이라고 외치면서 참신한 독서운동을 펼칠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고 있는 한편, 현대사를 다룬 신작 대하소설 <군화(軍靴)>를, 하반기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다.


선방 가는 길 - 선방의 향기 따라, 선객들의 발자국 따라

정찬주 지음, 열림원(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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