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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돈

제 35 장 무극지검(無極之劍)

갈유는 광지대사가 부탁한 일이 그저 환자 하나 돌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게 된 것은 손가장을 허둥지둥 떠나기 바로 전이었다. 무당에서 진무관주(眞武觀主)가 산문을 나서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무당의 진무관(眞武觀)은 삼백육십오일 닫히는 적이 없고 하루 십이시진 언제나 열려져 있는 곳이었다. 무당의 제자라면 누구라도 진무관에 들기를 원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무림에서 인정하는 무당의 제자로서 모든 소양을 배울 수 있었다.

진무관을 마친다는 것은 이미 무당의 무공 중 하나만이라도 일가(一家)를 이룰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무림에서 손꼽을 수 있는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무관은 무당 진산비기의 모태(母胎)가 되는 곳이었다. 끊임없는 수련(修練)과 정진(精進)을 요구하는 곳이었고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는 제자는 평생토록 산문을 나서지 못하였다.

그런 곳의 주인인 청송자(靑松子)가 자신의 직전제자인 현수(玄壽)를 데리고 광지선사와 갈유 일행에 합류하는 순간부터 갈유는 이 일이 매우 심각한 것임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더구나 송하령과 서가화를 개봉에 있는 복건도(福建都) 지휘첨사(指揮僉事)를 지낸 바 있는 관석당(寬晳塘)의 저택에 데려다 주고 나서 곧 바로 합류한 일행을 보고는 심각한 일이 아니라 엄청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개봉에서 일행에 합류한 인물들은 화산과 청성파(靑城派)의 인물들이었다. 불같은 성미로 많은 살생을 했다해서 벌써 이십년이나 묶어있던 금족령으로 산문을 나선 적이 없었던 화산의 파옥노군(破玉怒君) 규진(揆桭)이 화산오검 중 일인인 자하신검(紫霞新劍) 정무(鄭珷)를 대동하고 나온 것은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청성의 장로(長老)인 송풍진인(松風眞人)이 모습을 보인 것도 이 일이 어떤 것인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이들은 전혀 무슨 일인지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남들의 눈에 띠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입 밖에 내는 것조차 조심하고 있는 터에 대놓고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갈유는 개봉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일행에게 지나가는 길에 환자 한사람을 잠시 돌봐야 한다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만나 보려 하는 환자는 굳이 환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갈유에게 있어 거의 이십년이나 된 환자가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행은 동행할 수는 없었다. 갈유가 들르고자 하는 곳이 개봉 최고의 기루 청화원(菁花院)이었기 때문이었다.

청화원의 내원 깊숙한 소축(小築)에는 갈유와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리디 여린 커다란 봉목(鳳目)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고,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은 갸름한 얼굴과 조화되어 한눈에 보기에도 천하절색(天下絶色)이었다.

소녀라 하기엔 무리가 있는 이십대 후반의 여인이었지만 언뜻 보기엔 십대를 갓 지났다고 오해하기 알맞았다. 한쪽에 놓인 자수틀은 사람의 키보다 크고, 일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오색수실을 매만지는 여인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매달려 있다. 그녀는 자수(刺繡: 繡文)를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수를 놓는 방법은 여염집 아낙네의 그것과 달랐다.

백색의 비단이 걸려 있는 자수틀에서 일장이나 떨어져 앉아 형형색색의 실 뭉치들을 가지런히 꽂아 놓은 실 틀에서 직접 바늘을 날리며 자수를 놓고 있는 것이다. 바늘은 그녀의 손끝에서 발출되었다가 땀을 뜨고는 다시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나의 바늘이 날 때마다 그에 딸려가는 색실은 허공에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본래 자(刺)란 바늘땀을 나타내고 수(繡)란 자(刺)를 사용해서 원하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隋) ·당(唐) 시대에 손재주가 뛰어난 여염집 여자들은 주로 부처님 형상의 수불(繡佛)을 많이 놓았는데, 명(明)에 들어서면서 더욱 다양한 형상과 기법이 개발되어 그 모양이나 느낌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정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여인과 같이 자수를 놓는 여인은 없었다. 일장이나 떨어진 상태에서 바늘을 던져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바늘 던지는 것이야 암기(暗器)를 다룰 줄 아는 인물이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바늘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암기의 고수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릎에 놓고 바늘땀을 따는 일도 힘겨운데 일장정도의 거리에서 정확하게 자수를 놓는다는 것은 정확한 눈과 세밀한 감각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십수개의 색실들이 엉키지 않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여인의 손에서 두개의 바늘이 쏘아져 가고 궁장형의 머리를 틀어 올린 여인의 형상에서 머리매듭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갈유의 입에서 나직한 감탄이 흘렀다.

“네 격공수문(隔空繡文)의 기예가 이제는 극에 달했구나. 언제 저리 노력했을꼬?”

그의 감탄은 진심이었다. 만약 그녀의 손에 바늘이 아닌 독침이라도 들고 던진다면 피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인은 화사하게 웃었다. 남에게 특히 이 기예를 가르쳐 준 분에게 받는 칭찬은 언제나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버님의 가르침 덕이지요.”

허공을 격하여 자수를 놓는 수법은 갈유가 침(針)을 놓는 방법을 변형해서 가르쳐 준 것에 불과했다. 헌데 저 여아는 어느새 암기의 대가 보다 더욱 정교한 손놀림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본래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무공의 기초가 단단히 잡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녀의 손에 암기가 들려 있다면 그녀 주위 오장 이내에 든 자는 누구라도 그녀의 암기를 피하기 쉽지 않을 터였다.

차를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갈유가 빙그레 웃었다. 저 아이를 자신의 양녀로 받아 들인 것은 벌써 십년이 지난 일이었다. 청화원의 기녀(妓女)로서 최고의 기녀를 가리키는 청화(菁花)에 올랐고, 남편을 맞이하였으며 이 청화원의 내원총관(內院摠管)이란 위치에 있으니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라면 삶이었다. 아마 자신의 양녀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청화원을 유명하게 한 것은 백년 전통을 가지고 있는 청화(菁花)라는 기녀에 있었다. 기녀 중 최고의 기녀를 뽑아 청화라 불렀는데 청화원의 “꽃 중의 꽃”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청화의 심사조건은 까다로워 시서화금(詩書畵琴)에 능하고, 춤과 노래에 뛰어난 스무 살 이하의 순결한 처녀가 최소한의 조건이 되었던 만큼 절색의 미녀라 해서 청화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해서 역대 청화들은 대개 동기(童妓)에서 정식 기녀가 되는 십육 칠세가 되는 시기에 선발되어 스물세 살이 되기 전에 청화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청화는 유일하게 몸을 팔지 않는 기녀였고, 청화가 몸을 허락했다는 것은 그 날로 청화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청화원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헌데 사람 마음이란 이상한 것이다. 특히 사내의 마음이란 어리석을 정도로 기이하다. 꺾을 수 없는 꽃이라는 사실에 더욱 애를 태우고 비싼 술값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청화와 대작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사내, 특히 돈과 권력이 있는 사내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청화제도는 청화원을 개봉 최고의 기루로 만들었던 요인 중의 하나였다.

“탐화는 외출했다고?”

유곡(兪谷),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지내고 천관으로부터 천지회의 회주 중 한명으로 의심되는 인물.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유탐화를 묻고 있는 것이다.

“내일 오후 정도면 돌아올 것이란 전갈을 받았지요. 오랜 만에 오셨으니 편히 쉬시며 기다리시지요.”

그 말에 갈유는 고개를 저었다.

“가는 길에 잠시 들렸구나. 어쩌면 며칠 후에 다시 들를 수 있을 것 같고….”

말을 하다 문득 그는 어딘지 모를 수심이 어려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탐화는 계속 탕약은 복용하고 있는게냐? 양성(養成)도 계속하고…?”

그녀는 쭈뼛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 대답을 한다면 벌써 세 번째 거짓말이 된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 의미를 안다. 갈유는 탄식을 터트렸다.

“그럴거라 짐작 못한 바는 아니지만… 휴… 우… 언제부터 탕약을 먹지 않은게냐?”

“사 오년 되었지요.”

“어찌하려구?”

갈유가 야단치는 듯 다그치자 여인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차피 자신이 선택한 사람이고 후회 역시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양부(養父)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걱정이 태산 같을 것이다.

“천형(天刑)이라면 굳이 피하고 싶지 않다더군요. 소녀 역시 오히려 그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희는 잘 살고 있어요.”

“소연(小姸)아 너도… 쯧쯧….”

그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결국 혀를 찼다. 유곡을 안지가 벌써 이십년이 넘었다. 친구 손불이의 부탁으로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의원이라 해서, 명의라 해서 모든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늘이 내린 천형을 어찌 인간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자신의 처방도 그저 진행되고 있는 속도만을 늦출 수 있을 뿐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포기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벌써 포기했다는 말에 그는 내심 언짢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찌하랴. 이 아이를 탓하고 야단친들 무에 달라질 것이 있으랴. 일을 보고 다시 이곳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만나서 야단이라도 쳐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 이번엔 또 어디를 간 게야?”

유곡을 잘 알고 있는 갈유는 지금까지 유곡의 행선지나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에 초라함을 느낀 그는 불쑥 퉁명스럽게 물었다.

“담천의라고 하던가요…? 꼭 만나봐야 한다면서….”

말끝을 흐리는 소연의 말에 갈유는 처음에는 놀랐고, 그것이 지나자 짙은 의혹이 뒤를 이었다. 유곡이 직접 만나겠다고 하는 인물은 이 중원에 손을 꼽을 정도였다. 그것은 그 상대가 그의 행보에 무척이나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더구나 그 만나려는 상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더욱 궁금했다.

갈유는 자신을 기다릴 일행을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양녀가 수놓고 있는 자수틀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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