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덕의 진산인 계족산은 대전 시내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세상에 전하기를 날이 가물 때 이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고 기록된 산이다. 계족산성은 바로 이 계족산 정상에서 갈라져나온 지봉(支峰)에 있는 퇴뫼식 석축산성이다.
산성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 난 보물 제 209호인 동춘당과 대전광역시유형문화재 제7호인 옥류각을 경유해서 절고개에 오른 다음 산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을 선호한다.
동춘당을 일별하고 나서 빼곡이 들어찬 아파트 단지 뒤로 난 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웬 고풍스런 2층 누각 한 채가 가로막고 나선다. 여기가 바로 골짜기에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하여 '옥류(玉溜)'라는 이름을 얻은 옥류각이다.
이 건물로 다가가기 전 왼쪽 바위로 눈길을 돌리면 '초연물외(超然物外)'라고 깊이 음각된 송준길의 글씨가 보인다. 초연물외란 세상의 일에 관여치 않고 세속을 멀리한다는 뜻이다.
옥류각은 동춘당 송준길이 제자를 가르치고 송시열 등과 어울려 시문을 짓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식이며 넓은 대청과 온돌방이 있다.
마루 밑으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굵은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골짜기 부분에는 팔각형 주춧돌을 사용했다. 마루에 앉아 계곡을 바라보면 계곡의 경치가 액자 속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앞을 가리고 선 느티나무처럼 건축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자연친화적인 발상이 돋보이는 이 건물은 최근 건물의 뒤틀림이 심하고 노후화되어 보수정비에 들어갔다.
다시 산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널따란 임도가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절고개다. 여기서 계족산 정상과 계족산성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데 오른쪽으로 난 산성길로 접어들면 된다.
채 5리가 되지 않는 길이지만 이 길은 눈맛이 시원한 길이다. 산성에 이르는 길 내내 오른 쪽에 위치한 대청호의 넓고 푸른 물이 나그네를 따라온다. 좁고 호젓한 산길을 걷다보면 억새나 명감나무와 만나게 되고 지난 가을 산마가 허공에 주렁주렁 늘어뜨려놓은 씨껍질도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된다.
산길의 마지막에 이르기 직전에는 낙엽송 숲길이 이어진다. 낙엽송이란 우리가 그냥 부르는 이름일 뿐이고 정식 이름으로는 일본잎갈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짓는 짧은 시인 하이쿠에도 자주 등장하는 나무다.
사전에 나오는 대로라면 이 나무는 건축·갱목(坑木)·침목·펄프·선박용재로 쓰인다고 하지만 나무의 목질은 매우 까탈스러워서 땔감으로 쓰려고 해도 도끼질이 잘 먹히질 않고, 통나무집 건축용재로 쓰려고 건조할 때도 까딱하면 트고 비틀어지는 바람에 애를 먹는다고 한다.
쓸모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 나무는 5.16 쿠데타 나고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조림사업의 산물이다. 전국 곳곳에 안 심어진 곳이 없다. 얼마 전 다녀왔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성장한 고드미 마을 들어가는 들머리 산을 빼곡이 채우고 있던 나무들도 이 나무였다.
낙엽송 숲길을 벗어나 솔개 병아리 낚아채듯 고개 하나만 단숨에 올라서면 거기 계족산성이 나타난다. 여기가 바로 계족산성 남문지다. 문의 양측면을 둥글게 돌출시켜 방어력을 높인 독특한 형태다.
삼국시대 성들은 출입의 편리함보다는 방어에 유리한 곳에다 문을 만들었다. 이 계족산성도 능선에서 약간 비껴선 곳에다 성문을 만들면서 'S'자 형으로 우회해야만 성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성문 자체를 다락식으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드디어 산성 위에 올라섰다. 저 멀리 신탄진 쪽 외곽과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조선시대 때는 이곳에다 봉수대를 두고 충북 옥천군에 있는 환산 봉수대와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소이산 봉수대에 연락을 취하기도 했던 것이다.
성 둘레는 1037m이며 외벽의 높이는 7~10m, 석축의 폭은 약 3.7m 가량이다. 현재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북벽의 높이는 10.5m에 달하며 이 북벽에 융기된 석루(石壘)의 상부폭은 4.2m나 된다.
이 산성의 성체를 쌓은 방법은 작은 모쌓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교차로 하면서 납작한 할석의 외면을 맞추었다. 성 안쪽을 흙으로 쌓아 올리는 내탁공법을 썼으나 지대가 낮은 동쪽과 남쪽은 모두 돌로 쌓았다.
성내에서 발견된 유물은 백제의 토기와 기와조각이 가장 많고 통일신라 것이나 고려 시대의 어골문 와편(魚骨紋瓦片), 조선 시대의 자기편(磁器片)도 가끔 볼 수 있어 축성 이후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도 이 산성이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 신라유물이 많이 출토됨으로써 기존의 백제산성일 거라는 설을 밀쳐내고 신라 산성일거라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남문지에서 약 7m쯤 북쪽에는 봉수대 자리가 있다. 현재 봉수대 옆에는 복원을 위해 돌무더기를 쌓아두고 있다. 성벽을 죽 따라가면 북동쪽에 장대지(將臺址)로 추측되는 곳이 나오는데 10여개의 건물터가 있다.
정상에서 동벽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한참 내려가면 길이 110cm, 너비 75cm, 높이 63cm인 우물터가 나온다. 샘물은 그 아래로 난 1m의 가량의 수로를 통해 지름 1.5m 정도의 둥근 저수지로 흘러들게 되어있다.
대전은 백제 때 우술군이라 불렀다. 우술군에 붙은 이 계족산성은 백제가 웅진에 도읍했던 때 청원군 문의와 청주로 통하는 길목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옹산성이 이곳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백제부흥군의 요충지인 옹산성과 우술성을 함락시키는 기록이 나온다.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고구려 공략전에 나선 김유신의 앞길을 옹산성에 웅거해 있던 백제 부흥군이 차단했다. 성을 포위한 김유신이 군사를 성 아래로 가까이 보내어 "항복하면 목숨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부귀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적장을 회유했지만 백제 부흥군의 장수는 이렇게 맞받았다.
“비록 하찮은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충족하며, 병사들이 의롭고 용감하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이제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려던 그때 백제 유민들의 비장했던 분위기는 성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무심한 봄바람만이 텅 빈 성안에 앉아서 농성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럼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길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박재삼 시 <천년의 바람> 전문
쉬 지치지 않는 건 바람만이 아니다. 역사의 유장함을 믿는 사람도 쉽게 낙망하거나 지치지 않는다. 옛 성에 올라본 사람은 멀리본다는 말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된다. 성에 오르게 되면 풍경만 멀리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멀리 보게 되는 것이다.
천천히 성을 내려왔다. 멀게 느껴지던 산성 아래 산디마을이 가깝게 느껴진다. 어느새 풍경을 가깝게 끌어당기는 봄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