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보도자료 한 장이 한국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세계가 격찬하는 정보통신강국이라는 한국이 WEF가 조사한 네트워크준비지수(NRI)에서 아랍에미레이트연합보다 오히려 한단계 더 낮은 24위에 그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
반면에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43%에 불과한 싱가포르가 이미 80%를 훌쩍 넘어선 한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해 당시 많은 한국인들이 WEF 조사의 객관성에 의구심을 표명한 바 있다.
21일자 <파이낸셜 타임스>의 기사는 NRI지수에 대한 한국인의 의구심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인구 4백만에 불과한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최적의 환경을 지니고 있지만, 바로 이 작은 나라 규모 때문에 보급률을 높이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싱가포르의 초고속 인터넷 시장은 싱가포르 텔레콤과 스타 허브가 양분하는 과점체제다. 시장구조가 가격경쟁이 일어나 일반 서민들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사용료를 충분히 낮추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있는 것.
인구 4백만에 불과한 싱가포르는 양대 통신업체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에는 턱 없이 작은 시장이라는 것이 FT의 지적이다. 더구나 네티즌들이 VOD 등을 원활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속도 향상이 필수적인데 회선 업그레이드에 투입될 추가 투자비를 회수할 만큼 싱가포르의 시장규모가 크지 않다.
그러나 FT는 싱가포르에서 초고속 인터넷이 '뜨지' 못한 진짜 원인은 싱가포르 정부의 과도한 인터넷 검열과 규제 탓이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내고 인터넷을 사용하게 만들려면 그에 걸맞는 충분한 컨텐츠가 공급되어야 할텐데 싱가포르는 정부가 나서 포르노 등 위해 컨텐츠를 규제하고 있어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해야 할 동기를 꺾고 있다는 것.
싱가포르 관영 언론들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1위를 달리는 한국에서 온라인 게임 중독자가 급증하고 포르노물이 범람하는가 하면 화상채팅을 하다 결국 매매춘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며 초고속 인터넷의 폐해를 경고하고 있는 형편이다.
싱가포르가 정보통신강국을 지향하면서도 껍데기 IT국가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국민들의 삶 하나하나에 간섭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통제와 규제 위주의 권위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1993년 4월, 우리에게 익숙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주인공인 SF작가 윌리암 깁슨은 싱가포르에 다녀온 뒤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싱가포르는 마치 디즈니의 사장이 경영하는 국가라고나 할까? 이 나라의 표어는 '행복하시오, 안 그러면 죽일테니까'이다."
윌리암 깁슨이 본 싱가포르는 '사형제도를 지닌 디즈니랜드'였다. 길거리에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흠 잡을 데가 없지만 그래서 더욱 숨이 막히는 나라 싱가포르.
컨텐츠 없이 IT 발전이 있을 수 없고, 표현의 자유 없이 컨텐츠 산업도 발전할 수 없다면 결국 한국은 민주화를 이룬 덕에 정보통신강국으로도 발전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싱가포르의 딜레마가 한국에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