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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구아리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
부여 구아리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 ⓒ 부여박물관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는 ‘백제 왕궁터’를 찾기 위해 충남 부여군 관북리 백제유적(사적428호)에 대한 발굴조사를 22일부터 실시한다고 밝혔다.

11차인 이번 발굴조사지는 지난해 조사한 서편일대 3천여 평이다. 부여문화재연구소 발굴조사팀은 지난해까지 이뤄진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어느 정도 위치는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왕궁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단서들이 확인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백제시대의 금동왕관, 금동귀걸이, 금동향로 등 국보급 유물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으나 거의 왕릉 등에서 출토된 것이고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온 유물은 없다.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소산 남쪽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자기
왕궁터로 추정되는 부소산 남쪽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자기 ⓒ 부여박물관

부여박물관 관계자는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된 후 철저하게 파괴돼 유린되었기 때문에 백제멸망과 함께 백제왕궁은 역사의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660년(의자왕 20년) 7월18일 나당 연합군이 의자왕의 도성(사비성)을 포위하자 웅진성으로 탈출했던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항복했다.

7월29일 백제정벌을 치하하는 큰 연회가 베풀어지고 당상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소정방 등 나당연합군 장군들이 앉았다. 그때 백제의 신하들은 의자왕이 무릎을 꿇은 채 나당연합군 장군들에게 술잔을 바치는 모습을 보고 모두 울었다. 그 이후 백제는 역사의 전면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때가 온조가 나라를 세운지 678년 되는 해였다. 이때부터 성군이었다던 의자왕은 폭군으로 둔갑했으며 ‘삼천궁녀’이야기가 정설로 여겨질 만큼 백제의 역사는 심하게 왜곡됐다. 이와 함께 백제의 왕궁도 파괴되어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았다.

백제왕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지난해까지 10차에 걸쳐 진행됐다. 조사는 ▲ 부여왕흥사지 ▲ 익산 왕궁리 유적 ▲ 부여 궁남지 유적 ▲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 ▲ 부여 부소산성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지난해 관북리에서 발견된 지하저장시설
지난해 관북리에서 발견된 지하저장시설 ⓒ 부여박물관
이 결과 왕궁터로 여겨지는 부소산 남쪽일대에서 연못과 석축, 동서남북으로 교차된 도로유구와 금동제 귀걸이, 청동제 숟가락, 전달린 토기, 접시, 사발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또 부소산성에서는 금동제새머리장식, 금동귀걸이, 철제 무기류, 중국 자기 파편, 연꽃무늬 수막새 등이 발견됐다.

삼국사기에 ‘왕과 비빈이 배를 탔다’고 기록된 부여 궁남지를 큰 연못으로 규정하기엔 입증할 만한 사료가 없다. 하지만 궁궐을 지을 때 사용하던 연꽃무늬 전돌 등이 출토돼 그 인근에 왕궁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10차에 걸친 발굴조사에도 불구하고 왕궁터가 어느 지점에 존재했는지 결정지을 만한 유물은 아직 출토되지 않았다.

부여문화재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에 정밀조사를 벌이는 관북리 일대는 지난해 발굴조사에서 참외, 복숭아 등 과일씨앗이 출토된 백제시대 지하저장창고 시설 6기가 한꺼번에 발견된 곳”이라며 “이 저장시설이 왕궁이나 관아의 물품을 저장했던 창고구역으로 확인돼 인근에 왕궁터가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고 밝혔다.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은 백제 사비도읍기(538-660년)의 유력한 왕궁터로 지난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충남대학교 박물관이 7차에 걸쳐 조사를 벌여왔다.

그 결과 백제세대 장방형의 연못터와 대규모 공방유구, 와적기단 건물지, 도로, 식축, 지하저장창고 등과 목간, 연화문 와당, 각종 토기 중국제 수입자기류 등 1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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