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언제나 내게 한적한 이미지로 떠오른다. 바람 많은 날의 섬을 떠올리면 한적하다 못해 쓸쓸하게까지 느껴진다. 아마도 번잡한 일상에서 잠시라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섬처럼 좋은 여행지는 없을 것이다.
동백이 아름답다는 섬 지심도에 가기 위해 거제 장승포항에서 배를 탔다. 지심도까지의 거리는 3마일, 배로 달려서 20분 가량 걸린다. 멀리서 보니 지심도는 남북으로 길쭉하게 콩깍지 모양 엎어져 있는 섬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섬의 생김새가 마치 마음 심(心)자를 닮았다 하여 지심도(只心島)라 불렀다 한다.
선착장에서 내려 약간은 가파르게 놓여 있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간다. 10여분 정도 허위허위 올라간 후에야 비로소 섬에서 만나는 첫 번째 집인 담뱃가게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지심도 일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심도는 길이 2킬로미터, 폭 500미터로 면적은 고작 10만여 평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아주 천천히 걸어도 서너 시간이면 섬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다.
섬 정상으로 가는 길은 이제는 폐가가 되어버린 지심 분교 앞에서 갈라진다. 오솔길은 넓은 초원지가 펼쳐져 있는 헬기장 쪽으로 가는 길이고, 시멘트로 어설프게 포장한 길은 섬 정상의 해군시험통제소로 향한 길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지 망설일 것은 없다. 두 길은 결국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섬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한다. 아주 작아서 귀엽게(?) 생긴 폐교가 나타난다. 교실이 하나였을까, 둘이었을까? 손바닥만한 운동장을 둘러보니 모가지 꺾인 동백꽃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폐교를 나와서 갈지자로 낸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해군시험통제소 앞 아름드리 소나무가 선 공터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길을 조금만 더 가면 동백숲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섬 동쪽의 쪽빛바다를 볼 수 있고, 해군시험통제소 옆으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가면 일본군이 사용하던 포대로 가는 길이다. 중일전쟁 이후 지심도는 일본 해군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포대 3개와 탄약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폭격을 퍼붓는 미군 전투기에 대항하던 흔적이라고 하니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갔던 길을 되돌 아나와 동쪽 섬 끝을 향한다. 얼마를 갔을까, 울창한 숲길이 일순 확 트이면서 잔디밭이 나온다. 이곳 역시 일본군들이 경비행기의 이착륙을 위해서 만든 활주로라고 한다. 아마도 지금은 헬기장으로 쓰이는가 보다. 이 섬에는 아직도 일제가 짓밟고 간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다.
이곳에서 곧장 가면 해안선 전망대에 도달하게 된다. 갯바위에 앉아서 멀리 바다 위를 떠나는 화물선 두 척을 바라본다. 마냥 평화스럽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낭떠러지다.
전망대를 나와 선착장으로 가기 위해 산책로로 접어든다. 길 옆으로 털 머위, 천남성 따위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지심도 안에는 희귀종인 거제 풍란을 비롯해 후박나무, 소나무 등 총 37 여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한참을 더 가니 대숲이 나온다. 대숲이 나타나는 가 했더니 이내 동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길이 이어진다. 마치 터널을 들어가듯이 한낮에도 사방을 어둑어둑할 만큼 울창한 동백 숲이다.
원래 지심도는 동백섬이라고 불릴 만큼 동백꽃의 군락지다. 두 팔을 벌려도 껴안아지지 않을 만큼 굵은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한두 그루가 아니다. 멀대 같이 키가 큰 이곳의 동백나무들은 겨우 동백꽃 몇 송이씩을 달고 있을 뿐이다.
동백꽃이란 게 본디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는 꽃은 아니다. 나무마다 시차를 두고 피었다가 진다. 그러나 이곳의 동백꽃이 기대만큼 탐스럽지 않은 것은 지나치게 빽빽하게 심어진 탓이 아닌가 싶다.
오솔길을 따라서 오다 보면 폐교된 분교 앞 에는 지심도라 쓴 표지석이 있다. 상형문자 같이 생긴 글자꼴이 재미있다. 조금 더 가면 천주교 지심도 공소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에 성모상이 외로이 서 있다.
시간을 보니 배 타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너무 빨리 걸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후회가 됐다. 천천히 눈을 들어 거제도 쪽을 바라보니 눈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선착장을 향해 서서히 언덕을 내려간다. 이제 나는 이 동백나무의 울음이 가득한 섬을 떠나 도회의 복판에 떠 있는 한 개의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
순대 속 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등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술잔에 떠있는 한개 섬이다.
술 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그대 또한 한개 섬이다.
- 신배승 시 '섬' 전문
충남 금산의 <좌도시> 동인인 신배승의 시에다 곡을 붙여 가객이 아니라 '노래를 사는 사람'인 장사익이 부르는 <섬>이 생각난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섬' 아닌 사람이 없다. 외로움은 누군가 기댈 대상을 찾아서 헤매는 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나는 일부러 지심도(只心島)의 지자를 다만 지(只)자가 아닌 길이 지(咫)자로 읽는다. 가까운 곳에 마음이 있는 섬. 섬 어딘가를 거닐다 보면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젖고 싶은 까닭이다.
돌아오는 뱃전에서 갈매기들이 오락가락 날아다녔다. 지심도는, 저 갈매기들은 내게 자신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늘 외롭기 마련이라는 것을 침묵으로 설(說)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3월 초에 지심도에 다녀왔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시기상으로 지금이 지심도 동백이 한창일 때니 그리 무리한 기사는 되지 않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