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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색> 책 표지
<산색> 책 표지 ⓒ 안병기
중국 명나라 때 사람인 운서주굉 스님이 쓴 <죽창수필>을 선별해서 번역한 책이 나왔다. <산색>(도서출판 호미)은 <죽창수필>에 나오는 450여 가지 이야기 가운데 140여 개만 추려내 만든 책이다.

효성이 남달랐던 저자 운서주굉 스님

책의 저자인 운서주굉 스님은 1535년 중국 명나라 때 중국 항주 인화현에서 태어났다. 출가한 후 항주 운서산에 정주하면서 선과 염불과의 일치를 주창하는 등 선과 염불, 계율 등에 두루 관심을 갖고 <선관책진> <계살방생문> <사미율의 요략> <아미타경소초> 등 30여권의 책을 저술했던 대종장이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운서스님은 유가(儒家)의 선비 집안 출신으로 두 번이나 상처하고 세 번 혼인했다.

2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1살에 어머니마저 하늘로 떠나시자 어버이에게서 받은 막중한 은혜를 갚고자 출가를 결심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살이었다. 그는 걸망 속에다 위패를 넣고 다니면서 끼니 때가 되면 반드시 부모님께 먼저 공양을 올리고 나서야 자신도 공양을 들만큼 효성이 남달랐다.

출가하려고 결심하고 동침하지 않았던 세 번째 아내인 탕씨와는 출가한 뒤에도 함께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런 모습에서 매우 인간적인 풍모가 엿보인다.

불교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책 <죽창수필>을 선역

선역자인 연관스님은 해인사에서 출가한 후 여러 강원과 선원을 거치면서 수도에 정진해 왔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환경단체인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주는 제6회 풀꽃상을 받았으며 <금강경간정기>등을 번역 출간하신 분이다.

<죽창수필>은 연관 스님의 번역으로 출간된 이래 15년 가까이 불교대중들에게서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산색>은 바로 이 책의 선역본이다.

연관스님은 '죽창수필선역본을 내면서'라는 글에서 "조각 조각이 전단(전檀)인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랴만, 승가(僧家)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버릴 수야 없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세상사는 이치에 대해 말씀한 항목을 더 많이 담은 것"이라고 책의 내용을 설명했다.

전단이라는 것은 자단(紫檀)·백단(白檀) 따위 향나무를 두루두루 이르는 말인데 <죽창수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한결같이 향이 나는 이야기인지라 골라내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승가에 관한 이야기를 줄이는 대신 세상살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집어넣은 것은 "격류를 건너는 듯한 세상살이의 튼튼한 징검돌이 되고 저물어 가는 듯한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남은 햇살이나마 되고자 함"이라고 연관스님은 설명했다.

이 책의 내용을 몇 줄의 글로 아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야기가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책의 내용을 대신할까 한다.

책에 나오는 몇 가지 이야기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산색'이라는 글은 환(幻)이 눈을 어지럽히면 본질을 보지 못한다고 경계한다.

가까이 산 빛을 보면 남색인 듯 창연히 푸르르더니, 멀리서 바라보면 남색에 청대 물감을 들인 듯 울연히 비취빛을 띠고 있다. 이렇게 산의 색깔이 과연 변한 것일까.

산색은 전과 다름이 없으나, 눈의 시력이 차이가 있어서, 가까운 곳으로부터 점차 멀어짐에 따라서 푸른빛이 변하여 비취색이 되었고, 먼 곳으로부터 점점 가까이 올수록 비취빛이 변하여 푸른색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푸른색은 그럴만한 인연이 모여 그렇게 되었고, 비취빛도 역시 그러해서, 비취색이 환(幻)과 같을 뿐만 아니라, 푸른빛도 역시 환과 같을 따름이다. 대개 만법이 이와 같은 것이다. - '산색'


그런가 하면 '마음의 비유'라는 글에서는 마음을 다른 것에 비유한다는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지적한다.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하는 것은, 대개 거울은 능히 물건을 비추되 물건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는 미리 맞이하지 아니하며, 물건이 막 이르렀을 때에도 겨울은 증애(憎愛)하지 않으며, 물건이 사라진 후에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 성인의 마음이 항상 고요하게 비추되 삼제(과거, 현재, 미래)가 공(空)했으므로 이렇게 거울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점만을 취했을 따름이며, 사실대로 말하면 거울은 실로 무지한 물건으로서 마음이 과연 이와 같이 무지한 것일까. - '마음의 비유'


'출가 비구는 부모에게 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부처님의 법과 '스님이나 도사라도 부모에게 절해야 한다' 한다는 왕법이 서로 상충될 때 둘 다 범하지 않고 피해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럴 때는 '이렇게 하면된다'고 운서주굉 스님은 그 해법을 제시해준다.

비구는 부모님을 봬 오면 반드시 절을 하면서 '이 분은 나의 부모님이시니, 부처님과 같은 분이다' 하고 부모는 자식의 절을 받게 되면 피해버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요, 아니면 답례하면서 '이 자는 부처님의 제자지 나의 자식이 아니다'하고 생각하면, 양자가 모두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 '스님이 부모에게 절하다'

선(禪)을 말하였으되 향상현담(向相玄談)을 말하지 않다

저자인 운서주굉 스님은 선을 말하였으나 아득하고 깊은 이치를 말하지는 않는다. 철저히 깨닫기만을 권하여 '깨달은 후에 말할 줄 모를까 염려 말라'했을 뿐이다.

또 '스님이 무엇이기에 부모에게 절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부처가 된 후에 부모의 귀의를 받아도 늦지 않다'라는 등 군데군데 승가의 구습이나 적폐를 지적한 점도 눈에 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선(禪)에 대한 책이 범람하고 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읽고 나면 공허하고 관념적인 느낌을 벗어던질 수 없는 책이 얼마나 많던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원숙하면서도 진솔한 필치로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준다는 점이다. 삶에 찌들고 지친 나 같은 범인에게 청량한 솔바람 소리로 다가와 영혼을 맑게 씻겨주는 것이다.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뭔가 삶의 좌표가 필요한 분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을 읽고 성이 차지 않는 분들은 불광출판사에서 나온 《죽창수필》을 권합니다.


산색 - 죽창수필 선역

운서 주굉 지음, 연관 옮김, 호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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