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명성황후는 시해 당시 국모(國母)였으며 1897년(광무1) ‘명성’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고종 황제의 정실을 ‘민비’로 칭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또한 ‘을미사변’은 일본의 개입을 부정하고자 하는 일본의 시각에서, 동족간의 권력 투쟁으로 보는 ‘사변’은 적절치 않아 ‘을미왜란’으로 재정립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5년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일본 깡패(낭인)를 궁중에 침입 시켜 건청궁(乾淸宮)에서 명성황후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불태웠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왜변(乙未倭亂)이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민비ㆍ을미사변’으로 교육 받아 오고 있다. “독도의 영유권 등을 논하기 이전에 선결되어야 할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 재정립”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1980년대 이후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 작업이 새롭게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기존 평가 작업이 철저히 왜곡되었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됐다. 즉 이전에는 을미왜변이 미우라고로의 단독 범행, 또는 그의 후원을 받은 민간인들이나 일본 낭인들의 범행,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차츰 이러한 통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직후 일본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고, 국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당시 미우라고로 공사 등 47명을 입건했으나, 곧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석방했다. 더욱이 이 사건에 대한 모든 증거를 폐기하고 사실을 조작, 일본 정부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한 채 ‘민비시해’라는 단순 사건으로 처리한 이래 일본은 침묵을 고수하며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점 등이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을미왜란)- 춘생문사건(복수창의)- 을미의병-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현대사의 중요한 맥이다. 이도철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그가 10여년 전부터 제천 출신의 충민공(忠愍公) 이도철(李道徹ㆍ1852~1895)의 행적을 올바르게 밝혀 역사를 재정립하는 데 작은 밀알이 되고자 나섰다. “고조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 이전에 나라의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주야와 원거리를 마다치 않고 발길을 옮기고 있다.
그 결과로 지난 25일 ‘충민공 이도철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학술세미나는 그간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던 충민공 이도철과 주변 정세를 종합적으로 분석, 역사를 올바르게 재조명하고 평가하는 학술회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춘생문의거와 관련, "<대한국사> 등에는‘이도철이 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춘생문(春生門)을 월장하다 실패해 참수 당했다’고 왜곡된 채 기록되어 있다. 춘생문의거는 이도철, 임최수 등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친일세력으로부터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려한 복수창의(復讐倡義)였다"고 그는 주장했으며 현존하는 사료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춘생문의거로 이도철과 임최수는 신문 과정에서도 배후인 고종에 대해 함구했으며 ‘역모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이듬해 1896 2월 ‘이도철과 임최수에 내려진 판결은 공정치 못했음’이 관보에 실리고 내각으로부터의 복권상소가 잇따랐다. 이에 고종은 내각의 복권상소를 받아 들여 이도철과 임최수를 복권하고 ‘충민(忠愍)’이란 시호를 각각 내린다. 훗날 반일ㆍ배일 순국인사를 모시는 장충단에 제향토록 해 오늘날의 장충단제에 이르고 있다.
현재 그는 충민공과 고종의 관계, 당시의 국ㆍ내외 정세를 가늠케 하는 고종의 밀지를 비롯해 수차례의 서한문 등 다량의 유물ㆍ사료를 확보하고 있어 사학전문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국내의 역사재정립이 이루어지길 갈망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종합적인 상황으로 볼 때 역사재정립은 많은 걸림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래도 역사는 재정립되어야 한다”라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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