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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개인적 용무로 충북 옥천읍에 갔다. 옥천역 뒤를 지나갈 때였다. 근처 국제농기계(株)의 수상한 굴뚝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공장의 높다란 굴뚝에 쓴 글귀가 내 눈에 힘을 주어 초점을 한 데 모으게 만들었다.
'서슴없이 개혁하자'
아아, 참으로 통쾌한 저 한 마디. 영창 피아노 소리 이래로 이처럼 '온 세상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를 듣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무한감동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개혁적인 굴뚝을 발견한 기쁨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어제 내가 옷을 약간 얇게 입었던가!).
보라, 그토록 사려 깊고 똑똑하다는 국회의원들조차 개혁에 맘부림, 몸부림치는 시늉만 내고 있을 때 무생물인 저 굴뚝만이 홀로 분연히 일어서서 목 놓아 개혁을 외치고 있지 않는가. 아득한 정신을 가다듬어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전후 사정을 볼 것 없이 찰칵,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나서 난 제자리에 오래도록 멈춰 서서 국제농기계(株) 굴뚝에 새겨진 글씨들의 변화무쌍한 변주를 지켜보았다.
"(누가 뭐래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천지개벽이 온다쳐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딴나라 굴뚝이 아무리 방해할지라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눈발이 점점 거세게 휘날리고 있었다. 굴뚝의 글씨가 또 한 번 꿈틀했다. "비가 와도 개혁하고 눈이 와도 서슴없이 개혁하자."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굴뚝 쪽으로 좀더 바짝 다가가 말을 붙여보기로 했다.
"아니, 임자 있는 굴뚝과 통하기라도 했소? 왜 이마에 주홍글씨처럼 써 붙이고 서 있으시오?"
"이보시요, 길손 양반. 가던 발걸음 잠깐 멈추시고 이내 말쌈 좀 들어보소. 옛날, 호랑이가 신탄진 담배, 거북선 담배 필 적에 난 왼종일 시꺼먼 연기에 몸을 맡긴 채 청춘을 흘러보냈소.
누구는 자기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고 설레발을 치는 것을 내 들었소이다만 내가 바로 그짝 났소. 몸은 비록 땅에서 일하지만 마음은 늘 하늘을 지향했드랬소. 그 점은 인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오.
그러다가 호랑이가 거북선 담배를 피기 시작했소. 그땐 나도 쫌 폼나게 살게 됐나 싶었지. 고걸 2차 산업인라등가 뭐라등가 허드만. 얼굴도 깨끗해지고, 살결도 보드라와지고 막 살만하다 싶응게 금방 무슨 정보화산업 시대가 왔다잖소. 연기 없는 산업이라등가 뭔가 해쌓더구만.
우리 굴뚝도 이젠 개혁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인갑제. 왜 사람들만 개혁을 전세냈당가, 특허를 냈당가? 인자 우리네 굴뚝도 개혁해야 산다는 생각이 굴뚝같단 말이오. 시방 내 말이 뭔 말인지 알아 묵것소? 왜 굴뚝이 개혁 얘기 꺼내면 불온해서 국가보안법이라도 걸린다요?"
나는 굴뚝이 더 흥분하기 전에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누가 그 따위 소릴 허고 댕긴다요? 내 오랜만에 님의 주옥같은 이야기를 듣다보니 잠깐 넋이 나간 모양이지라우. 아먼, 굴뚝님 야그대로 서슴없이, 이짝 저짝 눈치보지 말고 개혁해야지라. 사람과 굴뚝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서 말이요."
순간 굴뚝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머물다 갔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만이라. 내 듣자 허니 인간 세상에선 지금 개혁이 지지부진하다 들었소. 혹 나그네에게 힘이 있다면 날 여의도 국회의사당 굴뚝으로 채용해 주시면 안 되겄소?"
"보시요, 굴뚝님, 제 맘 같으면사 당근 굴뚝님을 국회의사당 굴뚝으로 추천하지라, 추천허고 말고요. 근디 내같은 무지랭이가 뭔 힘이 있겄소잉? 설령 힘이 있다쳐도 님이 옮겨가는 그 순간 모르긴 몰라도 딴나라 굴뚝들이 들고 일어나 난리 죽일 것이요.
님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서슴없이 개혁하자'라는 글귀 때문이것지라우. 사태가 그러할지니 굴뚝님은 그냥 굴뚝님이 선 이 자리에서 개혁을 전파허고 계시요. 고것도 결코 한찮은 일은 아닐 것이구만이라."
나는 굴뚝에게 후일을 기약하면서 자중자애할 것을 당부하고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세상에서 가장 개혁적인 굴뚝을 만난 나를 축복이라도 하듯 서설이 내렸다. 난 이후로도 오랫동안 저 아름다운 굴뚝을 잊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