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었다. 무척 사랑스러웠고 나만 따랐는데, 14살 어린 나이에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가버렸다. 법정에 서면 말하기 전에 먼저 눈물부터 나오더라."
김중곤(81·제주) 할아버지는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미쯔비시 중공업에 끌려간 여동생은 당시 북정초등학교(현 광주시 수창초교)를 막 졸업한 때였다. 4남매 중 외동딸이어서 부모도 애지중지 키우던 딸.
동생 김순례씨는 44년 나고야에 강제 동원돼 그해 12월 발생한 대지진으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김 할아버지 자신도 강제동원 피해자이긴 마찬가지. 44년 봄 일본군 고사포 7270 부대로 징병 당한 것. 한 집안에서 장남과 외동딸이 각각 일제의 전쟁 소모품으로 이용된 것이다.
부인은 여동생과 같은 학교 동급생이자 친구.
"해방되고 돌아와 부모님 앞에서 '나만 살아 돌아와 면목이 없다'고 울부짖었다. 부모가 '네가 내 딸이나 마찬가지다'며 같이 울었다."
여동생 생각을 지울 수 없던 김 할아버지는 결국 같은 강제동원 피해자였던 여동생 친구와 결혼했다. 재판이 진행됐지만 부인은 일본 나고야에 가는 것을 끝내 피했다. 청춘을 버린 그곳에 두 번 다시 가고싶지 않다는 것.
조선 근로정신대 재판은 지지부진 6년여를 끌어왔고, 결국 부인은 4년 전 사망했다. 김 할아버지는 "어디 한두 마디 말로 지난 세월을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 | "왜 우리에겐 대변할 정치인 한 명 없었나" | | | [현장]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한맺힌 목소리 | | | | 나고야 지방법원 기각 판결에 대해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 양금덕씨는 "법정에서 기각판결을 이해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재판장한테 달려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26일 광주 근로정신대 재판 보고회장은 피맺힌 한을 간직한 피해 할머니들의 울분으로 가득했다.
피해자 박혜옥(75) 할머니는 "오늘 설명회장에 오는 도중에도 버스를 타다 피해자 한 분이 쓰러져 집으로 돌아갔다"며 " 기각 소식을 듣고 다들 누워 있다시피 하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이 자리에 서 있다"고 말했다.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다"
박 할머니는 "십 수 만명이 일본에 끌려가 죽고 학대받은 역사를 우리 후손들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이어 "형제같이 지내던 교육계, 법조계, 정치인들을 다 만나봤지만, 헛수고라고만 하더라"며 "단 한사람 내려와 보지도 않고 다 안 된다고만 하는 것이 더 원망스러웠다"며 이 소송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 지적했다.
피해자 김혜옥(74) 할머니는 "기각 소식을 듣고 같이 눈물을 흘려준 변호단과 후원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위로 받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며 "왜 우리들에겐 피맺힌 한을 대변해 줄 단 한 명의 정치인도 없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