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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7일 한 방송사 뉴스에서 ‘밀양지역 고교생 41명이 여중생 자매를 1년간 성폭행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어떻게 저런 사건이 발생하나 하고 충격을 받았으나 내가 직접 조사를 하리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흘 후 그 사건과 관련하여 새로운 뉴스가 보도됐다. ‘조사 경찰이 피해 여중생에게 폭언을 하였다’, ‘인터넷을 통해 허위 피해사실이 유포되어 피해 여중생을 두 번 울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접한 국가인권위는 긴급히 상임위원회를 열고, 직권조사를 결정했다. 내가 팀장이 되어 직권조사팀을 구성해야 했는데 이 사건에서는 여성 조사관의 역할이 중요했다. 따라서 팀원 4명 중 2명을 여성 조사관으로 배치했다.

언론이 미리 밝혀 낸 경찰의 인권 침해

12월 14일 조사용 차량을 이용해 울산으로 향했다. 이 사건을 어떤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며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전날 발행된 ○○일보는 ‘어처구니없는 경찰’이라는 제목으로 경찰이 이번 사건을 조사하면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규정을 따르지 않고 피해자 보호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그 사례로 ▲여경에게서 조사를 받도록 해 달라는 피해자 요구 무시 ▲ 성폭행 피해 여학생에게 “너희가 고향 물 흐렸다”는 폭언 행사 ▲ 피해자 면전에 피의자를 줄 세워 놓고 ‘성 폭행범을 지목해 보라’고 요구 ▲ 경찰서 내에서 피해자가 가해자 가족으로부터 협박을 받도록 방치 ▲ 경찰의 과장되고 허점투성이의 발표 등을 지적했다. 또 다른 자료인 한 인터넷신문에는 사건 담당 수사경찰들이 노래방에서 피해자 실명을 거론하며 비하발언을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 경찰에 의한 피해자 인권 침해는 언론에 이미 드러나 있어 부지런히 뛰면 금세 조사를 마칠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이 생각은 현지조사 첫날부터 어긋났다. 첫날 울산지역 인권단체 및 피해자 가족을 면담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이번 사건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신상정보와 상세한 피해 사실들이 언론과 인터넷상에 유포돼, 정보 유출 경로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지역언론사를 조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피의사실 유포와 관련하여 제기된 진정 사건들을 다룬 경험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담당형사들은 언론에 자료를 제공한 사실을 부인하고 기자들 역시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협조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기자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기자들을 만나 이번 사건과 관련한 정보입수 경위 및 내용 등을 조사했다. 그런데 ‘이것은 범죄행위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구체적인 피해사실과 인적사항이 기록된 문건을 기자들이 갖고 있었다. 이 자료를 입수하는 순간, 이번 사건의 큰 줄기가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신원 비밀 보장해 달라”…“염려 말라”

지역 언론사 조사를 마친 후 울산지역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 관계자들을 만났다. 울산 여성의전화 이미영 회장과 생명의전화(울산지부) 김옥수 소장 등에게서 이번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들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로부터 사건 신고부터 경찰조사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 사실을 상세하게 청취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피해신고를 한 후 경찰들이 방문했을 때 피해자들의 신원이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을 보장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이에 경찰도 염려 말라며 ‘만약 비밀이 새면 옷을 벗겠다’고 다짐해 안심하고 사건조사를 받았단다. 그런데 경찰이 그 약속을 어기고 언론에 피해사실을 유출한 것이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TV방송에 크게 보도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고 했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이 방송에 보도되자 학교 친구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와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피해자 가족들은 그동안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억울하고 서운했던 일에 대한 하소연 등을 3시간이 넘게 털어놓았다.

또한 국가인권위에서 철저히 조사해 다시는 자신들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조치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피해자 가족들의 하소연과 호소를 들으며, 낮에 기자들로부터 입수한 자료가 새삼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도대체 경찰은 왜 피해사실을 유출하여 어린 학생들에게 이중의 고통을 주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해당 경찰서에 대한 조사는 범인식별실 확인부터 시작되었다. 경찰은 식별실이 피의자를 한두 명밖에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좁아서 사무실에 가해자를 줄 세워 놓고 피해 여학생에게 지목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대질 신문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식별실은 4평 규모였고, 실제로 사람을 세워 보니 최소한 8명 정도는 한 번에 수용할 수 있었다. 경찰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점검하고 조사한 결과 언론에서 지적했던 경찰의 피해자 보호 소홀이 모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심야 조사, 공개된 사무실에서 피해자 조사, 휴식시간을 배려하지 아니한 무리한 수사 진행 사실들도 추가로 밝혀졌다.

성폭력특별법, 성범죄 수사 및 공판 관여시 피해자보호에 관한 지침(대검예규) 등에는 조사과정에서의 피해자 보호에 대한 규정이 포함돼 있다. ▲ 가능한 여성경찰관이 조사하며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조사 ▲ 가급적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 금지 ▲ 심야 조사를 피하고, 피해자들에게 후환이 미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피의자 등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등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켜진 것이 없었다.

외면 받은 성폭력 피해자 보호 규정들

이번 조사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밝혀내고자 했던 부분은 피해 사실이 어떻게 언론에 누출되었나 하는 점이었다. 성폭력특별법 제21조에는 성폭력 범죄를 조사하는 공무원은 피해자의 신원을 누설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제35조에서는 이를 위반한 공무원에 대하여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여 성폭력 피해자의 신원누설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담당 경찰이 언론에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 범법행위를 했다고 시인하는 것과 같다. 그런 상황에서 담당 경찰은 강력하게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기자들로부터 입수한 명백한 증거 앞에서 어찌할 것인가! 마침내 보도자료 외에 공보자료라는 명목으로 피해자 이름 등을 익명 처리한 5쪽 분량의 별도 자료를 기자들에게 제공하였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로써 주요한 조사는 모두 마무리를 지었으나 이렇게까지 경찰관들이 피해자 보호 의무를 지키지 않는 원인에 대해서도 밝혀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피해자 보호 관련 규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성폭력 피해자 보호 관련 규정은 성폭력특별법을 비롯하여 인권보호수사준칙, 범죄피해자보호규칙 등 각종 지침, 훈령 등이 있다. 경찰청에서는 이런 규정들을 집약하여 130쪽 분량의 매뉴얼로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담당 경찰관들은 이런 규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 이는 성폭력사건 수사전담반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울산지방경찰청에서는 성폭력 피해자 인권보호 관련 교육을 수차례 실시했고, 수사시 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준수하라는 공문도 수차 전달했다.

그럼에도 수사 형사들 개개인에게는 제대로 전파가 되지 않았고 관련 규정 지침들이 실제 수사에는 활용되지 않았다. 특히 각 경찰서마다 성폭력사건수사전담반을 운영하고 있지만, 몇 개 과로 분산 배치돼 구조적으로 팀을 이루어 성폭력 사건을 다루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더욱이 다른 경찰들과 비슷한 양의 일반 사건을 담당하면서 부가적으로 성폭력 사건을 맡음으로써 성폭력전담조사관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어려운 운영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점을 보면서 밤낮 일에 치여 사는 일선 경찰관의 어려운 처지가 일면 이해되기는 하였다.

3일 동안의 현지조사를 마친 후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국가인권위는 권고를 결정했다. 우선 성폭력 피해자의 인적사항, 피해사실 등을 언론에 누설한 경찰공무원 2명에 대하여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해당 경찰서장에 대하여는 징계 권고했다. 경찰청장에게는 성폭력피해자 관련 규정을 일선 수사관들이 철저히 숙지하고 실제 수사에 반영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유사사건 재발시 관리, 감독을 맡은 간부급 경찰공무원을 중하게 문책하는 등의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할 것도 권고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3월호(3월 26일 발간)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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