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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도(78)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
정원도(78)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 ⓒ 추연만
민간인 33인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는 1953년부터 3년8개월간 독도를 지켰다. 역사는 33인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할까? 혈기에 찬 젊은이들이 벌인 영웅담으로 기록할지 아니면 민족정기를 바로세울 바로미터로 평가할지 주목된다.

독도문제가 국민적 관심사항이 된 이 때,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정원도(78) 회장을 3월 30일 울릉도 도동에서 만났다.

정 회장은 의용수비대에 참여한 동기에 대해 "독도는 울릉도 주민의 삶의 터전이며 당연히 우리 땅"이라며 "독도에 일본배가 들락날락하고 일본인이 독도에 다케시마 푯말을 세운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한다.

그래서 대원들은 "독도에 들어가 다케시마 푯말을 제거하고 들락날락하던 일본배도 쫓았다"며 "언론에 자주 비추는 암벽의 '한국령'이란 한자글씨도 그 때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정 회장은 "나무로 대포모양을 만들어 일본 쪽을 향해 '가짜 대포'를 배치"한 일화도 소개하며 "홍순칠 대장이 지휘한 독도의용수비대는 소량의 무기로 무장했지만 독도에 상륙하는 일본 배와 전투를 벌여 수차례 격퇴시켰다"고 회상했다.

독도에 많은 관심을 쏟는 현실에 대해 정 회장은 "정부가 답답하단 생각이 든다"며 "50년 전에 항일운동을 제대로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의견을 나타냈다. 그래서 그는 울릉군의회나 군민들이 궐기대회에 초청해도 가지 않았다 한다.

독도수비대 예우에 관한 실태에 관한 물음에 정 회장은 "훈장은 받았으나 연금혜택 등 국가유공자에 버금가는 예우는 전혀 없다"며 "이젠 만불 시대를 훨씬 넘지 않았나? 독도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대원들에게 국가가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독도를 자손만대에 영원히 지켜야 한다"며 "독도를 최소한 5-6세대가 사는 유인도로 만들어 여름철엔 하룻밤을 잘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꾸준히 투자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의견을 나타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세운 한국령 표지석
독도의용수비대가 세운 한국령 표지석 ⓒ 울릉주민 김철환씨 제공
다음은 정원도 회장과 나눈 일문일답 요지

- 민간인 신분으로 독도의용수비대에 참여한 이유는.
"고 홍순칠(1929~1986)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 '독도에 일본배가 들락날락하고 다께시마 푯말도 세우고 있으니 군대에 다녀온 젊은이가 나서자'고 권유했다. 독도는 울릉도 주민들이 애지중지한 생활 터전이고 당연히 우리 땅이란 생각이 들었다. 20대는 혈기가 왕성할 때가 아닌가? 1953년에 독도에 상륙해 다케시마 푯말을 뽑아버리고 들락날락한 일본배도 쫓아버렸다."

- 독도의용수비대 규모와 활동은.
"처음엔 10여명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조직체계를 맞추다보니 33명이 되었다. 53년 4월부터 56년 12월까지 3년 8개월간 독도에서 활동했다. 우리는 박격포 1문과 경기관총 그리고 M1소총 칼빈 소총 몇 정만으로 무장했다. 그래서 울릉도 나무로 대포모양을 만들어 일본을 향해 '가짜 대포'를 배치하기도 했다.

일본은 비행기로 정찰을 하고 배로 접근해 우리의 무장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래서 접근한 일본 배를 향해 박격포와 총을 쏴 여러 차례 격퇴한 적이 있다. 54년엔 큰 격퇴사건이 있었다. 1시간 후 일본 NHK 방송에서 보도한 후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 의용수비대는 어떻게 생활했나.
"처음엔 서도의 물골(물이 나서 불리는 지명)에 진지를 만들었으나 물이 짭짤해 식수로 사용하가 어려워 동도로 이동했다. 드럼통을 놓아 빗물을 받아 생활했다. 녹물로 인해 노란 밥을 먹기 일쑤였다. 울릉군민 대다수는 수비대 활동에 박수치지 않았다. '저런 미친놈들이 있나. 거기 가서 뭐 해'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홍순필 대장이 사재를 털고 여기저기 물품을 조달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 달에 한 번 물품을 조달한 배는 이필영씨 소유였는데 배 삯을 못주어 홍 대장이 감사패로 대체한 기억이 난다. 40-50일 넘게 배가 못 올 땐 미역을 채취해 비상식량 한 움큼 넣어 멀건 죽 쑤어 먹으며 연명했다."

의용수비대 모습. 경비초소와 표지석 제막 후 촬영
의용수비대 모습. 경비초소와 표지석 제막 후 촬영 ⓒ 울릉 주민 김철환씨 제공
- 의용수비대가 독도경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이 독도가 자기 땅이라 더 강하게 주장하지 않을까.
"50년간 한국경찰이 독도에 상주해도 일본 땅이라 억지주장을 하는데, 오늘날에 독도에 다케시마 푯말이 그대로 있다면 과연 독도가 우리 땅이라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언론에 보도되는 '한국령'이란 글씨는 우리가 들어가 암벽에 새겨 넣었다."

- 3년8개월 독도생활에 사상자는 없었나. 대원들 현재 상황은.
"좋은 일을 해서 그런지 사상자는 한 명도 없었다. 56년 12월에 경찰에 경비업무를 인계한 후 수비대원 9명은 경찰에 특채됐다. 나도 1년 2개월간 경찰 생활을 했다. 현재 대원 중 20명은 자연사, 1명은 행방불명 상태며 생존자는 12명이고 울릉도에는 4명이 살고 있다.

- 최근 다케시마의 날 제정과 교과서 문제 등을 계기로 국민들이 독도에 관심이 많은데.
"이승만 정권 땐 독도 12해리로 선을 그어 독도 인근 일본 배는 나포했으나 일본은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그러나 한일협정하는 바람에 뒤로 감추어 둔 무엇이 있는지, 정부가 질질 끌려가고 있다. 정부가 그 때부터 일본에 강하게 했더라면 일본인들이 오늘날 이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정부가 답답하단 생각이 든다. 50년 전에 항일운동을 제대로 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이 되풀이 되겠는가?"

- 민간인 신분으로 독도경비를 맡았는데 이후 정부는 어떤 예우를 했나.
=홍순칠 대장이 이리저리 야단을 쳐 1966년에 보국훈장, 1999년에 광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연금 혜택 등 국가유공자에 버금가는 예우는 전혀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대원들과 유족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젠 만 불 시대를 훨씬 넘지 않았나? 생존자 12명도 나이가 많다. 젊은 시절을 독도에서 보낸 데 대해 국가가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독도는 민족정기가 서린 역사 그 자체다. 국민들이 힘을 모아 독도를 자손만대에 영원히 지켜야 한다. 독도를 최소한 5-6세대가 사는 유인도로 만들어 여름철엔 하룻밤을 잘 수도 있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방법을 찾아 꾸준히 투자하고 지원해야 한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주둔한 동도엔 지금도 독도경비대 진지가 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주둔한 동도엔 지금도 독도경비대 진지가 있다.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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