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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다. 즉 FT가 '5%룰'('경영참여' 목적으로 주식 5% 이상을 보유한 투자자에게 보유목적과 주식 취득자금의 원천을 명기하도록 의무화)에 대한 우리나라의 증권거래법 개정과 관련하여 '완전히 정신분열증 태도(completely schizophrenic)'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우리 금융당국도 즉각 반격에 나섰다. 이번 5% 룰에 대한 개정은 1934년도에 미국에서 제정된 'SEC 13D' 조항을 원용했을 뿐 그것을 국수주의와 연결 짓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것이 그 항변의 논거다.

필자는 이러한 갑론을박을 접하면서 큰 아쉬움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외부 비판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들과 당국자들의 천편일률적인 감정적인 대응 때문이다. 외국의 유수언론들이 우리의 문제를 비판적 톤으로 이야기하는 순간 시시비비의 관점은 사라지고 전무 아니면 전부라는 식의 항전태세부터 취한다. 곧 여론이 들끓게 되면 문제의 본질은 가려지고 자극적 단어만 침소봉대되거나 외피만 긁어대는 아우성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분히 꼼꼼히 그 비판의 행간을 읽어 보면 귀담아 들을 이야기들도 참 많다. 어찌 보면 이번 FT의 기사도 감정을 배제하고 합리적 잣대를 갖고 대하면 우리에게 결코 달콤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보약이 될 만한 의미심장한 말들도 많이 담고 있다. 우리 속담에 명약은 쓰다 하지 않았는가.

우선 FT가 지적했듯이, 소버린과 같은 적극적 포트폴리오 투자자들의 관계투자(Relational Investment)에 대해 우리가 보이고 있는 지나친 과민반응이다. 먼저 개념부터 짚어보면 전통적인 포트폴리오 투자란 일반적으로 회사에 대한 경영권 행사를 목적으로 하는 직접투자와는 달리 투자자금의 안전성과 수익 극대화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그러한 투자기법을 말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포트폴리오 투자자들은 보유기업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에는 아예 관심이 없으며 국제금융가에서 그러한 예를 발견하기 또한 쉽지 않다. 그보다는 기업 실적이 기대치에 못 미치면 시장을 통해 그 주식을 매각해 버리는 방식을 주로 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포트폴리오 투자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투자기법, 즉 관계투자(Relational Investing)와 결합하게 된다. 즉, 관계투자는 장기 포트폴리오펀드인 연기금과 보험회사 등의 기관투자가들을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는 또한 전설적인 투자가인 워렌버핏(Warren Buffet)의 투자기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이들은 '주식보유자(Shareholder)'이기를 거부하고 '기업의 주인(Shareowner)'이 되기를 원한다. 주인의식을 갖고 기업 경영진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기업 경영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를 주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기업사냥과는 그 근본을 달리한다. 단지 전통적인 포트폴리오 투자기법의 소극성을 뛰어 넘기 위해 주주에게 법으로 부여된 주주 권리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투자기법일 뿐이다. 이것이 곧 관계투자다.

또한 이러한 관계투자는 기본적으로 "내 돈이라면 그렇게 소극적이겠는가"라는 물음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후생활, 그들의 물질적 행복 그리고 고객들의 소중한 자산을 관리하는 펀드매니저로서 과연 선량한 수탁자의 의무(Fiduciary Duty)를 진정으로 다하려는 투자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투자기법은 장기투자의 경우 더욱 탁월한 실적으로 호응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아마도 워렌버핏은 가장 훌륭한 예가 될 것이며 그 밖의 펀드들에서도 여러 가지 실증적인 연구들을 통해 그 투자기법의 우수성이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그 중 미국의 캘퍼스(Calpers) 펀드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관계투자의 선도 역할을 하고 있는 런던의 헤르메스(Hermes) 펀드의 경험 자료는 기업지배구조의 개선을 통한 관계투자의 우수성을 입증해 주고도 남는다.

즉, 지난 5년간 헤르메스의 관계투자 편입종목들은 FTSE 지수를 4.5% 능가했으며, 유럽회사에 투자한 종목들은 1.9%, 미국에 투자한 종목들은 10.1%나 각각 해당국의 주가지수를 능가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캘퍼스의 자료에서도 공히 찾아 볼 수가 있다.

다음으로 5% 룰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 금융당국이 원용했다는 미국 SEC(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증권거래 위원회)규정의 13조 조항은 지난 34년 제정된 것이나 지난 98년 2월 개정을 거치게 된다. 그 조항 개정의 취지는 5% 취득 시 투자가들에게 보고 사항을 더욱 완화해서 부담을 경감시키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기존의 기관투자가들(브로커, 은행, 보험회사, 투자회사 그리고 투자자문회사)에 속하지 않는 투자자라 하더라도 매입 주식이 총발행주식수의 20%를 넘지 않고 경영에 영향을 끼칠 의사가 없다면 단순투자가(passive investor)로 인정하여 까다로운 13D의 보고를 생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3D의 보고서식은 투자자의 실체와 배경, 주식매입자금의 원천, 그리고 취득목적 등이 세세히 기재되어야 하는데 반해 13G는 아주 간단한 최소한의 취득 사실만 기재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한 개념정의에 있어서도 SEC의 13조항은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해서 규정하고 있다. 즉, 의결권과 관련된 투자자와 기업 간의 분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분쟁의 내용이 첫째 사회적, 공공적 이슈이거나 경영진의 보수, 이사들의 연금 그리고 비밀 투표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간주하지 않는다.

둘째로 기업지배구조와 관련된 사항 중에서 독약조항(poison pill)의 삭제, 경영권 방어조항의 변경, 그리고 부적격한 이사의 해임과 관련된 사항의 발생 시에는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간주할 수도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셋째, 회사의 매수자를 찾거나 중대한 자산의 매각, 기업의 구조조정 혹은 새로운 이사를 선임하려는 내용을 담은 주주제안을 낼 경우 이것은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간주된다.

이에 비해 우리 증권거래법 개정안의 제 200조 2항(주식의 대량보유 등의 보고)을 보면 임원의 선임, 해임 또한 직무의 정지, 이사회 등 회사의 기타 기관과 관련된 정관의 변경 등의 일반적인 기업지배구조의 핵심적 사항까지 전부 포괄적으로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음으로 인해 투자자들, 즉 외부주주들이 기업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상당히 제한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즉, 이것은 투자자들이 기업을 방문하거나 전화, 우편 등을 통해서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건설적 대화마저 경영행위로 간주되어 근본적으로 차단시킬 우려가 있으며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 세계적으로 그 운용 실적을 인정받고 있는 펀드들의 관계투자 행위를 가로 막을 개연성을 띤다.

필자는 최근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참여자금이 장기화되는 추세에 주목한다. 공공연금의 주식운용규모가 급증하고, 올 연말엔 기업연금제도가 실시될 예정이며 최근엔 적립식 주식형 펀드로의 장기성 자금들이 급속도로 유입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장기성 투자자본과 기업 경영이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협조할 수 있는 공평한 게임의 틀을 짜나가야 한다. 투자자들도 기업의 주인으로서 법으로 보장된 주주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주식시장의 독재체제에서 참여민주주의체제로의 이행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기업은 견제와 균형을 갖춘 건강하고 투명한 기업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 또 다시 기업, 정치, 언론 등이 작당하여 국수주의 정서로 재벌 총수를 옹호하고 수구적 질서로 회귀하려 한다면 우리 자본시장과 더 나아가 나라 경제의 미래는 결단코 밝지 않을 것이다. 국경 없는 자본시장의 논리를 지배하는 것은 수익 추구이지 관대함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본인은 지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영국의 Hermes Pension Fund에서 프로젝트 컨설턴트로 일하며 한국 관련 포트폴리오에 대한 컨설팅 업무를 수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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