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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장 시검사도(屍劍邪刀)
두개의 돌로 만든 침상. 그 가운데 금을 그어 놓은 듯 늘어져 있는 붉은색 천과 파란색 천. 침상 위에 놓여진 하나의 석관(石棺). 휘장을 사이에 두고 또 하나의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한 인물.
누워있는 인물은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모습이었는데, 기이하게도 이불 밖으로 나온 얼굴은 짙은 적갈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죽어있는 듯 했다. 하지만 들어 온 일행은 금방 그가 풍철한임을 알아보았다. 중원이 좁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호한(好漢)이다.
청송자는 침상 가까이 다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수양이 깊은 그였지만 애틋한 정을 가지고 있는 풍철한이 죽은 듯 누워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뾰쪽한 바늘로 가슴 한 가운데를 찌르는 것 같더니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끝내 말은 하지 않았다.
풍철영의 시선이 괴의 갈유를 향했다. 갈유가 천천히 다가가자 풍철영은 돌침상 위에 누워있는 인물의 이불을 걷었다. 이불은 물에 적셔 있는 듯 축축했고, 무거워 보였다. 그리고 드러난 그의 몸 위에는 하얀 천이 그의 전신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천으로 비춰 보이는 전신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고, 얼굴색과 같이 짙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피가 배어 나온 뒤 응고된 것처럼 보였다.
“심한 상처나 부상은 없소. 그럼에도 전신에서는 열이 끓어오르고 피부가 마치 마른 장작처럼 딱딱하게 굳어갔소.”
갈유는 고개를 끄떡이며 다가가 풍철한의 전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부상은 허벅지와 팔에 그어진 검상 정도와 옆구리에 할퀸 듯 보이는 상처가 고작이었다. 특이한 상처는 더 이상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열사흘 동안 정신을 잃은 채로 이렇게 누워 있다고 했다. 이 사내는 이 정도의 상처에 저렇듯 정신을 잃고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풍철한이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사귀고 싶기도 하지만 막상 사귀기 꺼려하는 양의검 풍철한인 것이다.
헌데 물에 적신 천이 걷혀지자마자 그의 전신에서는 마치 모래가 물을 빨아들이듯 금새 물기가 사라졌다. 그의 몸에 열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물기가 금세 마를 정도로 펄펄 끓는 열은 아니었다. 마치 노인의 살결처럼 살갗이 허옇게 일어나고 동상이 걸린 것처럼 푸르스름한 반점들이 피부에 나타나고 있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갈유마저도 처음 보는 증상이었다. 이런 경우는 그 역시 듣도 보도 못했다. 마치 나이 먹은 노인이 급하게 노쇠해가는 과정이 이러할 것이었다. 갈유는 입과 목 주위를 살피다가 풍철한의 마른 피부가 손에 묻어나는 것을 느끼며 급히 흰 천을 그의 전신에 덮었다. 아마 풍철영 역시 이런 현상을 보고 궁여지책으로 물에 적신 천을 덮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하신 치료나 조치는?”
갈유가 본 풍철한은 죽어도 벌써 죽어야 할 상태였다. 이 정도의 열이 열흘 이상 지속되었다면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풍철영의 치료나 조치가 아주 훌륭한 것이라는 의미였다.
“분주(汾酒)를 증류하고 정제해 하루에 두 번 전신을 소독했소이다. 그리고 끓인 물을 식혀 적신 천을 항상 덮어 놓았소.”
“그 외에는?”
갈유는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고 굳이 숨길 일도 아니었다.
“하루 두 번 전신 혈맥을 타통해 주었소이다.”
무척이나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전신혈맥을 타통해 준다는 것은 공력을 심하게 손상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하루에 두 번이라면 웬만한 고수라도 닷새를 버티지 못한다. 아무리 우애 있는 형제간이라도 그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내공이 정순하고 깊다는 의미였다.
“장주의 안목이 노부를 경탄케 하는구려. 의술을 아는 노부도 그 이상을 생각하기 어려웠을 거요. 아마 장주의 그런 조치가 아니었다면 동생은 벌써 죽었을 것이오.”
칭찬을 듣자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천하의 명의라는 갈유의 입에서 자신이 한 조치가 매우 옳은 것임을 들은 풍철영은 마음이 놓였다.
“동생의 상세를 어찌 보시오?”
“미안한 말이지만 노부도 이러한 증세를 본적이 없소. 다만 의리(醫理)로 보면 동생은 전신에 화농(化膿)이 있다 할 수 있소. 자세한 것은 진맥을 해야 알 수 있을 것이나 전신이 적갈색으로 변한 것은 그의 전신에 이미 죽은피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오. 더구나 기이한 것은 피부의 건조와 반점이 나타나는 현상이오. 그것은 독(毒)이나 기이한 약물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확신할 수는 없소.”
갈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많은 환자를 보았고 치료해 왔다. 희귀한 질병도 많이 접해 보았고, 또한 희귀한 체질도 경험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은 처음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독(毒)에 의한 것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독이라면 그가 알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동생은 십삼일전 이곳에 도착했소이다. 그의 몸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본 장주로서는 그의 상처가 오래되어 화농(化膿)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소. 하지만 말도 나누기 전에 그는 의식을 잃었고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소. 그것은….”
풍철영은 말을 하다가 말고 몸을 돌려 다른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돌침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돌로 만든 석관(石棺)이 놓여 있었는데 일행들이 그의 뒤를 따라 다가오자 천천히 석관의 뚜껑을 열었다.
“놀라지들 마시고 자세히 봐주시오.”
석관 속에 누워있는 시신을 보는 순간 일행들은 모두 경악스런 표정과 함께 구토가 올라옴을 느꼈다. 아마 그들이 점심을 먹고 이곳에 들어 왔다면 그들은 아마 모두 토해냈을 것이었다. 어찌 이것을 보고 사람의 시신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은 동생의 친구인 참풍도(斬風刀) 가군영(珂君楹)이오. 그는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어 있었고 동생은 그의 시신을 안고 이곳까지 온 것이오.”
참풍도(斬風刀) 가군영(珂君楹)은 풍철한과 함께 산서지역에서는 꽤 위명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바람을 가를 수 있다는 참풍십이식(斬風十二式)은 산서제일도(山西第一刀)라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그런 인물이 이렇게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게 변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시신은 관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죽은 시신이 저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시신이 짙은 적갈색으로 변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노송(老松)의 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 갈라 터졌는가 하면, 온몸의 피가 다 빠져 나간 듯 삐쩍 말라 있는 모습은 죽은 지 수백 년은 흘러 버린 목내이(木乃伊:미이라)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검흔(劍痕)은 어깨로부터 가슴까지 그어져 있고, 허벅지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허나 목숨을 앗아갈 만한 검상은 분명 아니다. 저런 정도의 부상은 참풍도 가군영이라면 보름 정도의 요상이면 일어설 수 있었다. 사인(死因)은 분명 다른데 있었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시신에서 느껴지는 괴기로움과 사이한 기운이었다. 감지 못하고 떠져 있는 퀭한 두 눈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일반적으로 두 눈을 까뒤집으면 흰자위가 보여야 한다. 허나 이 시신은 반대다. 흰자위는 어디로 가고 온통 검은색이다. 썩은 것 같지만 동공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오.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그의 몸이 먼저 반응했소.”
말을 한 사람은 갈유였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풍철한 역시 죽으면 이렇게 변할 것이다. 아니 살아있는 현재에도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풍철영의 조치가 아니었다면 벌써 이렇게 변했을 것이다. 의원답게 다른 사람보다 더 유심히 시신을 살핀 그가 침음성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대개 공포(恐怖)라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며 반응하지만 간혹 자신이 이기지 못할 지독한 공포가 밀려들 때에는 몸이 먼저 반응을 하게 되고 그 부위부터 고사(枯死)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오.”
그 말에 홍칠공 노육이 침음성을 터트렸다.
“시검사도(屍劍邪刀)가 확실하군!”
이것을 확인하고자 그 먼 길을 달려 온 것이다.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했지만 이곳에 온 모든 일행은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시검사도라고 불리는 현상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광지선사는 나직이 불호를 외었다. 시검사도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상실한 마공(魔功)을 익힌 자,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병기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었다. 특정한 검이나 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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