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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력사의 근본 중당
ⓒ 정혜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히에산 연력사

연력사에서 수행중인 재일교포 2세 스님으로부터 안내를 받았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력사는 일본 천태종의 본산으로 일본밀교의 도량, 국가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하는 도량이다. 종조(宗祖)인 전교대사(傳敎大師)가 직접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 앞에는 창건 이래 한번도 꺼진 적 없는 후메쯔노 호오토(不滅의 法燈)가 밝혀져 있다.

연력사의 근본중당(根本中堂)은 일본의 3대 목조 건축물의 하나이고 다시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건축물이다. 히에산에는 천일회봉(千日回奉)이라는 유명한 수행법이 있다. 하루 40km씩을 회봉 하면서 중간 중간 기도를 한다. 천일 회봉의 마지막 9일은 불식, 불면하면서 오직 진언만을 외운다. 수행이 끝나고 나면 ‘아사리(생불)’이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는다.”

▲ 연력사의 장보고 장군 기념비
ⓒ 정혜자
그가 중요한 곳을 보여주겠다고 하며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장보고 장군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었다. 연력사의 2대 조사인 자각 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 스님이 당나라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 당시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장보고 대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당나라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며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을 받았다.

엔닌 스님은 순례기에서 자신을 도와 준 장보고의 인품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장보고에 대한 공경과 흠모의 정이 곳곳에 배어 있는 서한을 남기기도 했다. 청해진 대사 장보고 비(淸海鎭大使 張保皐 碑)라고 새겨진 이 기념비는 높이 4.2m로, 거북 받침 위에 2.25m 높이의 비신(碑身)이 용 갓을 쓴 모습으로 2002년 건립되었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한글로 장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국땅에서 위대한 우리의 조상을 만난 기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히에산의 숙방, 고지림

이곳에서도 역시 맨발의 수행승을 볼 수 있었다. 예불을 드리고 시설 이용과 일정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연력사 부주지 스님이 인사말을 통해 "연력사에서는 해마다 종교 평화 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작년 이슬람 대표의 발제가 있었다. 기독교와 이슬람 종교의 갈등은 관용의 종교인 불교도의 역할이 중요하다. 각 종교마다 지향점이 다르지만 참다운 종교란 우선 각자가 평화를 구하는 것이다. 개인의 평화를 구하는 수행의 방법이 고지림의 방식이다"고 말했다.

▲ 연력사의 사찰음식 오른쪽 위 하얀것이 깨두부
ⓒ 정혜자
▲ 울력중인 연수단 실무자들
ⓒ 정혜자
새벽 참선, 마루 닦기 울력 등 강도 높은 수행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저녁 공양시간에 공양예절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한국 사찰의 공양 예절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 내지 않기, 음식이 담긴 그릇은 반드시 손으로 받치고 먹기, 공양전과 후에 감사의 게송 읊기, 다 먹은 그릇은 찻물로 헹구어 마시기 등 수행승들에게는 더욱 엄격한 예절이 적용된다고 한다.

최희정(미황사 템플스테이 실무자)씨는 “수련을 시키던 입장에서 수련을 당하는 입장이 되니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며 “ 돌아가면 수련생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 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가지고 있는 옷가지를 겹겹이 껴입고 숙소 앞에 도열했다. 고지림의 법당 예절은 양말을 벗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진희(29세 조계사 실무자)씨는 “양말을 벗으라고 해서 당황스러웠다”며 “우리는 법당에 들어가면 양말을 신는 것이 예의인데 문화가 좀 다른 것 같다”고 좌선 소감을 말했다.

한국 스님들이 앞자리에 나란히 좌정하고 뒷자리에 실무자들이 앉았다. 재가자와 스님들이 한자리에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 아니다. 미동도 없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는 40여 분의 시간.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고지림의 좌선 담당 일본스님도 한국 스님들의 좌선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에 한국 불교의 진면목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덕조 스님은 “수련기간 동안 내내 춥고 배가 고파서 다시 행자가 된 기분이지만 도를 닦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고 소감을 이야기 했다.

조동종의 대본산, 영평사

▲ 외부에서 본 영평사 입구
ⓒ 정혜자
평균 수령 700년이 넘는 삼나무 숲길을 지나 고풍스런 가람의 모습이 보인다. 일반인을 위한 연수도장(키이죠우카쿠) 안으로 들어서면 최신식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5층으로 지어진 건물에 자동문이 열리고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도 있다. 단정한 차림의 어린 수행승들이 접수를 받고 안내를 하며 분주히 움직인다.

▲ 수행승으로 입문한 소년들
ⓒ 정혜자
영평사의 부원감 스님은 인사말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단가제도가 생겼다. 각 가정의 출생과 혼인관계를 모두 사찰에 등록시키는 일종의 호적제도이다. 각 종파에서는 단가 신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일환으로 템플 스테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말사(末寺)의 신도를 그룹 지어서 본사(本寺)로 수련을 보냈다.

요즘은 단가제도가 무너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현대인에게는 발생되는 정신적 인플레이션을 치유시킬 목적으로 외국인등 많은 사람들이 영평사를 찾고 있다”고 했다. 한국과 비슷한 실정이었다.

저녁공양을 마치고 영평사 자체제작 비디오를 상영했다. 영평사는 칠당가람(七堂伽藍)구조이다. 산문, 불전, 승당, 주방, 화장실, 욕실, 법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승당, 화장실, 욕실은 삼묵도장이라 하여 잡담이 금지되어 있다. 영평사의 고리(사찰의 부엌)에는 지난 1930년대에 물류 운반을 위해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 조과를 참관중인 실무자들
ⓒ 정혜자
새벽 4시 기상. 좌선실에 모여 좌선을 하고 불당으로 이동하여 조과(아침의 독경) 참관을 했다. 영평사의 예불은 일반인에게는 향을 올리는 것 이외의 참여를 불허한다. 수백 명의 수행승들이 도열한다. 소매 끝에서 방석 크기의 천을 꺼내 자리에 펴고 앉는다. 품 안에서 조그마한 경을 꺼내들고 독경을 한다. 낮고 엄숙하게 법당 안을 울리는 진언(다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돋았다.

수백 년을 하루같이 모여서 나라를 위해, 조상을 위해,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진언을 읽어 온 것이다. 중간 중간 수십 명이 되는 역대조사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그들에 대한 존경의 염을 잃지 않는다. 지금의 일본을 만들어온 응집력의 현장을 본 때문일까. 예불 장면이 쉽사리 뇌리에서 지워 지지 않았다.

▲ 연수 일정을 마치고 단체사진
ⓒ 정혜자
연수단은 사전연수를 통해 팀별 세미나를 준비했다. 시설팀, 운영팀, 인력팀으로 나뉘어져서 각 팀별로 현황을 파악하고 어떻게 한국 내 사찰에 적용 시킬 것인지를 논의했다. 토론을 마치고 가진 개인별 의견을 개진하는 자리에서 도재경(문화관광부 사무관)씨는 “우리의 불교문화가 일본에 비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음을 재확인 했다. 시설면에서 그들에게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점을 보완해서 현대인에게 정신적 인플레이션을 해결해 줄 대안을 제시하고 대외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한국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체험시키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연수단 단장으로 참가했던 주경 스님은 “아무리 국민성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인의 친절함은 꼭 배워야 한다”며 “일본인의 친절함에는 물론 상업적인 복선이 깔려 있지만 우리는 수행으로 닦여진 친절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일본 연수 두번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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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초보라서 잘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기사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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