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면서 국초부터 사찰 창건을 비롯한 크고 작은 불사들이 수없이 일어나게 됐고, 자연히 불화의 제작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려 불화는 드물어 그 실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다만 문헌자료에 의해 그것이 대단히 화려하고 장대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불화의 대표주자였던 원나라에서조차 “섬세하고 화려하다”라고 품평한 것을 보면 고려불화의 가치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불화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70년대까지는 일본에 있던 혜허의 수월관음도 한 점 뿐이었으며, 나머지는 우리나라의 부석사, 수덕사의 벽화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당시 만해도 고려시대 불화가 아름답다는 것을 문헌에서는 봤어도 실물을 본 것이 알려진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1967년 일본의 도마가이(불교 미술사)가 조선학보(일본에서 발행하는 한국사 논문)에서 ‘조선불화와 고려불화가 약 70여점 정도 일본에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고려 불화에 대한 연구가 급진전한다.
이것을 계기로 故 이동주 선생이 1973년 한국일보에 ‘일본속의 고려불화를 찾아서’라는 탐방기를 연재하게 되었고, 1978년에는 일본에서 고려 불화 특별전을 열어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고려불화가 공개되었다.
1981년에는 일본의 조일(아사히)신문사에서 ‘고려불화’라는 탱화집을 발간하고 한국의 중앙일보사에서도 같은 시기에 이동주 감수로 ‘고려불화’를 펴내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려불화는 일본 속에 남아있는 탱화를 중심으로 하고 그 외에 한국과 구미에 흩어져 있는 것을 종합하면서 한국회화사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 이야기하는 고려 불화는 대개 탱화(幀畵)를 지칭하는 것인데 보통 절에 가서 볼 수 있는 괘불과는 달리 높이 120~180cm, 폭 100~120cm 정도의 두루마리 그림, 즉 족자 그림과 같은 그림들이다.
그림의 구도는 상하 2단으로 나누어지는 엄격한 권위적인 구도법이 적용되었고, 문양에 있어서는 고려시대 상감청자나 나전칠기에 나오는 국화, 모란, 구름, 운학문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서 당시의 귀족(권문세족)들의 호화로운 미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고려불화의 제작 시기는 주로 1300~1350년, 대원제국 간섭기 때에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짧은 시기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을까? 원당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큰 사찰 중에서 한 쪽 구석에 지은 원당도 있고, 절 자체가 원당사찰인 경우도 있다. 여기에다 모셔놓은 것은 예사로운 것을 모셔 놓을 리가 없다. 그 당시 권문세족들이 원당에다 안치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것이 고려탱화라는 것이 미술 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모든 명작들은 공통점이 있다.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김홍도의 씨름도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서 누가 이길 것인지, 다음에 씨름을 할 사람은 누구인지, 등등을 읽어낼 수 있다. 고려불화도 마찬가지이다. 섬세하고도 화려하다.
오늘도 강의는 예정시간이 훨씬 넘어서 끝났다. 하지만 ‘고려불화’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청중들의 얼굴에는 뿌듯한 만족감이 묻어 있었다.
사실 필자는 역사 교사로써 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지만 고려불화(탱화)가 이렇게 세계 속에서 인정을 받고, 또 그렇게 섬세하고 화려한 줄 몰랐다. 2등과 3등 차이는 “1등”차이 이지만 2등과 1등 차이는 “1등”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고 한다. 고려불화가 그런 것 같다. 학교에 돌아가면 고려청자뿐만 아니라 고려불화를 통한 고려 문화의 우수성도 강조하여 가르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