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슨 까닭일까? <죽비소리>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스님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죽비가 등에 닿을 때 들려오는 마찰음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들려온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막연하게 짐작해본다. 이 소리들은 잡다한 생각에 마음을 한데 모으지 못한 심란한 마음을, 나태해지고 게을러진 무력해진 마음을 깨우는 소리과도 같다. 그렇다. 죽비와 같은 소리다. 이것은 분명한 '책'임에도 소리가 들려온다. 이럴 때는 죽비와 같은 소리가 책 속에 묻혀있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사전적인 의미로 '연금술'이 돌덩이를 황금덩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연금술의 의미는 상당히 다양하게 사용된다. 그 다양함의 의미는 <죽비소리>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책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 책에서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연금술이 아니고서는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연금술이 '합리적인 과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 뜻을 음미할 수 있다. <죽비소리>도 그와 같다.

고전을 현대로 불러오려는 것으로 유명한 정민 교수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자는 유식한 척, 잘난 척 하지 않는다. 일종의 사명감을 갖은 것처럼 저자는 오로지 대중을 위한 글쓰기에 매진해왔다. <죽비소리>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 저자는 대중을 위한 연금술사가 되어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인터넷 언어를 생활화하는 사람이든 간에 누구든 향유할 수 있는 연금술을 선보이고 있다.

역사 속의 연금술사들이 찾던 '현자의 돌'은 <죽비소리>에서 주옥같은 120개의 문장들이다. 참으로 '주옥'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문장들은 저자에 따르면 '나를 깨우는 우리문장'이다.

문장을 쓴 이들은 누군가? 박지원, 이익, 허균 등 우리가 익히 들어왔고 알고 있었던 유명한 선비들이나 대중에게는 생소함을 주는 낯선 이름의 선비들까지 참으로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면야 좋겠지만 모른다고 해서 <죽비소리>의 소리를 듣는데 막힘이 생기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글쓴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작품에서 현자의 돌은 '문장', 그것뿐이니 크게 신경 쓸 이유는 없다.

120개의 문장들은 회심, 경책, 지신, 독서, 분별 등 12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죽비와 같은 문장이다. 아니, 죽비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이 문장들에 대한 예의일지 모른다.

<죽비소리>에 실린 문장들은 하나의 죽비처럼 깨우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문장들이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나태해진 마음, 군자의 길을 버리고 소인의 길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마음, 내일을 보지 못하고 오늘에 급급한 옹졸한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존재하는 문장들이다. 이 문장들은 비록 그 시대의 글쓴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혹은 세상을 위해 붓을 들어 태어났다고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 힘은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오히려 더하다면 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쁘기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는 이들은 반성 한번 하지 못하고 후회하며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맞이한다. 내일도 마찬가지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다. 한평생이 그렇다. 그런 이들의 마음속에는 찌든 때가 쌓여만 간다.

자신의 결점은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찌든 때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 산처럼 마음을 오염시키고 부식시켜 가는데도 알 턱이 없다. 누군가 나서지 않는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죽비소리>는 그 찌든 때를 씻어내는 빗물과 같다. <죽비소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경쾌하다. 또한 영롱하다. 그러면서도 힘이 느껴진다. 하늘을 보고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죽비소리>의 문장들과 함께 내일에 나설 자신을 반성해야 하는데 이제까지 찌든 때가 쌓인 이들은 어떻겠는가. 존재하는 것은 문장이지만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그것은 영원한 가르침을 주는 스승처럼 경계할 것과 반성할 것을 알려준다. 이 문장들을 죽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이제껏 <죽비소리>와 비슷한 형식으로 구성된 글들이 있기는 했다. 누구나 한번쯤 봤을 법한데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격언들을 모아둔 글들이 무수히 떠돌고 있다. 과연 그것들이 오늘날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격언들 하나하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위인이나 주제에 따라 뭉뚱그려 모아둔 그 덩어리들은 보고 지나치면 잊어버리는,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죽비소리>는 다르다. 일단 구하기 힘든 우리네 정신의 본바탕에서 구해낸 것이라는 것이 다르고 또한 저자의 노력 덕분에 본질이 호도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문장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하나의 문장들 옆에는 저자가 일종의 해설과 같은 덧붙임을 해놓고 있는데 그것들은 저자를 왜 연금술사라고 부르는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힘, 그 자체이다. 저자의 말들이 있기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옛것에 실린 제 뜻을 방금 잡은 살아있는 물고기를 보듯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의 웰빙'을 추구하기 위해 학원을 다닌다거나 이른바 '말씀'이라는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붐비는 오늘이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보고 있자면 안타깝다. 가까운 곳에서 한 번의 쉬어감과 반성의 기회를 얻어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그래야만 하는가?

<죽비소리>에서 마음의 죽비를 얻어 보면 어떻겠는가? 정신의 웰빙을 얻는다고 단언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죽비가 어깨를 내리치는 것과 같은 마찰음 속에서 눈앞에 존재하던 문장은 나를 ‘깨우치는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그 소리는 과거와 소통하는 과정이며 또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한 마음의 소리이다.

그것을 듣노라면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헤매고 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죽비와 같은 120개의 문장들은 그런 힘이 있다. 바라고 찾던 그것, 정신을 꼿꼿하게 잡아주는 그것이 여기에 있다. <죽비소리>에 있다.

관련
기사
옛글에서 죽비소리를 듣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마음산책(2005)

이 책의 다른 기사

옛글에서 죽비소리를 듣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