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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5월 결혼식 사진. 이들은 모두 안치환씨의 팬들이다.
98년 5월 결혼식 사진. 이들은 모두 안치환씨의 팬들이다.
98년 5월에 결혼을 했다. 아내와는 그해 음력 설날인 2월에, 결혼에 대해 눈빛으로 교환을 했으니 사귄 지 3개월 만이다. 아내와는 음악 때문에 만났다. 대학시절 노래패에 있었던 나는 민중가요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래서 사회에 진출해서도 끊임없이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가슴속에서 치미는 뜨거운 희열을 느끼면서 살았다. 그러던 차에 컴퓨터통신을 알았다. 컴맹이던 나는 <천리안>이라는 공간을 접하고는 별천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스럽게 민중가요 방을 찾아 헤맸고 정착을 한 곳이 당시에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란 대중성이 강한 민중가요를 불러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수 안치환씨의 방이었다. 안치환 씨와는 대학 2학년 때인 87년에 처음 만났다.

그는 당시 전업 민중가수로 서서히 용트림을 할 때였고 각 대학 캠퍼스를 돌면서 자신이 만든 '비합법테이프'를 널리 알리고 다녔다. 몇 곡의 노래만으로도 온 몸을 땀으로 적신 그에게 가까운 선술집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건넸다.

수줍은 듯 이마를 덮고 내려 온 머리칼이 그의 시선을 반쯤 가렸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마신 그는 내려앉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꾸밈없는 미소가 좋았다. 우리는 노래, 민중가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10년 후. 10년 전의 깊은 뇌리가 남아 컴퓨터통신이란 매개를 통해 그와 다시 조우한 것이다. 그동안 그의 공연을 보기위해 대학로 소극장을 누빈 덕에 생경함은 없었다. 천리안에 있는 그의 방에는 그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지금의 아내도 그의 열성 팬 중 하나였다. 나이가 제법 먹은 나는 '노땅' 취급을 받았고 언제나 그들의 형과 오빠로 불렸다. 그러면서 아내와 로맨스가 시작된다. 3개월간의 짧은 확인 절차를 거치고 우리는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됐다.

문제는 서로가 '결혼하자'란 말 단 한마디 없이 결혼을 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무촌(無寸)' 관계인 모양이다.

결혼식 날,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지금은 군법무관으로 추상같은 위엄으로 군기를 잡고 있지만 당시는 사법시험 공부한다며 한참이나 바쁜 친구에게 사회를 부탁했다. 붕어빵처럼 정해진 예식 순에 따라 단조롭고 순조롭게 식은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알고 있는 식순과 관계없이 사회를 보던 친구 입에서 '축가' 가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일순 당황한 나는 사회자석을 힐끗 쳐다봤고 친구의 뒤로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안치환씨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주례의 뒤로 걸어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피아노를 최근 배우기 시작했다며 음만 따서 치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독수리타법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전주를 들어보니 그의 히트곡이자 가요톱 텐 10위권 내에 진입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내가 만일'이란 곡이다.

내가 만일 / 안치환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댈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대 위해 노래하겠어
엄마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나 행복하게 노래하고 싶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내가 만일 구름이라면 그댈 위해 비가 되겠어
더운 여름날에 소나기처럼 나 시원하게 내리고 싶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이런 나의 마음을


하객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사실 결혼식장에는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은 터라 안치환이란 가수를 잘 몰랐을 때다. 그의 노래가 나오자 하객 중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부르기도 했고 밖에 있던 사람들도 식장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노래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눈물이 그렁거렸다. 안 그래도 어머니 때문에 목이 메던 차에 그의 노래가 감정선을 자극했다. 옆에선 아내의 볼 위로는 아이라인의 먹물을 머금은 시커먼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자칫 국화빵 구워내듯 맨송맨송 끝날 뻔한 결혼식이 축가 하나로 감동과 생기가 생겼다. 예상치 못한 그의 축가로 나는 내내 그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집들이 때 그를 초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쁜 스케줄 때문에 참석이 어렵다는 기별이 왔다. 대신 곧 열리는 그의 콘서트에 와달라며 티켓 두 장을 매니저 편에 보내 주었다. 이래저래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난 요즘도 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1년에 한번은 반드시 그의 콘서트에 간다. 뱃속에서부터 그의 노래를 듣고 자라난 아이들과 함께.

덧붙이는 글 | 결혼 에피소드 공모. 이 기회를 통해 축가를 불러 준 안치환씨에게 진심으로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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