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기. 그는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부민관폭파 의거를 실행하였다. 그는 외조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역사의식에 눈을 뜬 후 독립운동하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 경성사범학교 입학이 좌절된 후 공부를 시켜준다는 유혹에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강관회사 공원이 되었다. 그곳에서 유만수를 만나 일본강관 파업사건을 주도하였다. 1945년 1월 뜻을 품고 다시 귀국하여 3월에 유만수, 강윤국과 함께 민족반역자 처단을 목적으로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였고, 그 해 7월 부민관을 폭파하였다.
그는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좌나 우에 연루되지 않고 힘든 생활을 하였으나 1948년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인민청년군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이 때 고문을 한 자가 거창양민학살을 저지른 친일경찰 김종원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이 될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였고, 그 후 10여년간 연극배우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59년 이승만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조작사건으로 다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그는 정부의 독립유공자포상 신청 요청을 ‘대한민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아니고, 해방 후 친일반역자를 청산하지 못했으며, 추태를 보이는 독립운동자들과 한 무리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스스로 신청하지 않은 자존심 있는 독립유공자다. 더구나 광복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운동자들과 민족운동세력이며, 친일파들은 미국을 등에 업고 반공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 이 나라의 주류가 되었음을 설파하며, 따라서 8월15일은 민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친일파가 해방된 날로 본다. 이러한 광복절은 거짓 환상과 위선으로 가득한 날로 여겨 결코 경축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대쪽 같은 분이다.
해방이 되었으나 친일파는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였다. 박춘금은 악질 친일반역자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살육하는데 앞장선 공로로 작위까지 받고 제국의회 중의원까지 한 자이나, 그는 일본으로 도망치고 후에 재일사업가가 되었으며 고향 밀양에는 송덕비까지 서있다.
그러나 유만수나 강윤국과 같은 애국지사는 힘든 삶을 보내야 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는 처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김구 선생을 죽인 친일의 주구 안두희를 응징한 박기서를 법정에 세운 나라, 왜군 장교가 대통령이 되어 세운 애국지사의 현판을 훼손했다하여 양수철을 구속하는 나라, 을사오적 송병준의 후손이 매국의 대가로 받은 조상의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나라 이 나라가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이다.
과거를 잊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반성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며, 참회 없는 용서는 죄악을 은폐하고 뒷날 이 같은 행태가 되풀이되는 온상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원칙 없는 화해보다 역사정의의 실현이 우선되어야 한다.
참말로 슬픈 조국이다. 방관자는 방조자와 같으며 방조자는 바로 공범자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친일세력의 교만과 회포를 방관하는 사이 일본은 기고만장하여 우리를 깔보면서 우리의 땅을 제 놈들의 땅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친일청산을 통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그 민족정기의 위력으로 남북통일을 이룩하여 우리가 바라던 진정한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