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할 타율을 유지하는 이치로 스즈키가 톱 타자로 있고, 시애틀 매리너스의 대주주 또한 일본의 닌텐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일본인 관중도 유난히 많아 보이고 구장의 방송안내도 영어 다음에 일본어가 나온다. 간판이나 안내판에도 일본어가 명시되어 있다.
세이프코 필드는 미국 내에 있는 수십 개의 야구장 중에서 몇 군데 없는 흡연 장소가 있는 곳이다. 그것도 야외가 아닌 기자실 바로 뒤에 말이다. 그 연유 또한 미국과 달리 흡연문화에 관대한 일본과 관계가 있다.
십년 전 일본을 여행하던 나는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태우던 일본여성을 보고 적잖은 문화적 차이를 느낀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여성들은 타인의 눈길에 구애받지 않고 떳떳하게 공개된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카페나 대학교, 그리고 길거리에서 당당하게 흡연을 즐기는 여성을 볼 수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일본은 남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흡연에 있어서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관대한 편이다. 그런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일본에서 온 언론인이 많다 보니까 기자실 뒤에 아예 모래가 깔려 있는 재털이가 준비되어 있다. 그곳에서 일본기자들은 관중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태웠다.
재털이에 수북이 쌓여 있는 꽁초들을 바라보니 현대적 의미의 정복이라는 개념이 자꾸 머리를 맴돈다. 봉건시대의 정복은 전쟁을 통한 영토획득이나 자원확보에 국한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 해석되는 정복의 개념은 무력을 통한 강제적 침탈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인적자본을 통한 포괄적 의미로 확대된다. 이곳 시애틀의 세이프코 필드는 일본의 물결에 정복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야구장에서 일제 캐논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나 역시 세계를 잠식하는 일본의 일원으로 비춰질까봐 걱정이었는데 그 우려는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나에게 말을 붙이는 경기장 안내원이나 관중들은 하나같이 이치로를 취재하러 왔냐고 물어왔으니까 말이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란 우기는 일본의 영토 야욕도 경계해야겠지만 국가경제의 주춧돌을 빼가고 일본문화를 이식하고 배양하려는 현대적 의미의 정복에도 경계의 눈을 거두어선 안 될 듯싶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노력도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모여사는 곳은 그 각박스러움과 피말리는 경쟁 때문에 곧잘 '정글'에 비유되지만, 사실 정글은 누구를 편애하거나 일방적으로 배척하지 않는다. 정글은 자신의 살터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평등하게 다가간다.
생존하느냐 못하느냐는 단지 정글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간사회도 정글이 가진 평등의 법칙이 고루 적용된다면 국가와 인종에 상관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기회의 평등이고 마지막은 부의 평등이다.
덧붙이는 글 | 홈페이지 : www.seventh-haven.com